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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1 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1. 머리글 윤이상은 삶을 마감하는 199511월까지 78년간을 음악으로 인간과 민족 세계를 몸으로 살다간 음악가이다. 전반 반평생은 한국에서 살았고, 후반 반평생은 주로 유럽에서 살았다. 1917년에 태어나 1956유럽으로 나기 전까지 40여년간의 한국생활기의 윤이상은 일제강점기와 민족분단이 고착하는 시대이었다. 그에게 한국생활기는 민족유린되고 분단되는 극적 시기의 중심에서 몸으로 살다간 시기로서 그의 작품과 세계관 형성 결정적 역할을 시기이었다. 그에게 한국생활기는 단순히 살아가는 험의 시기가 아니었다. 그가 고백하고 있는 나의 음악은 조국의 전통에서 샘솟아오르고”, “음악은 인간의 피와 정신이 통하여야 한다라고 말하는 그의 음악 모두는 참된 인간성 추구과 민족의 전통에서 샘솟는 바의 국에서 살아왔다. 1) 이것은 한국생활기가 단순히 작품의 아이디어만을 이용 하는 이국적 태도의 생활기가 아니라, 윤이상의 모든 창조의 근원이 1 ) 니시무라 아키라(西村朗), 「無限の宇宙の一端から」, 『尹伊桑-わが祖國, わが音樂』 伊藤成彦 (東京:影書房,1992), 104; Rainer Sachtleben, Wolfgang Winkler,"Gesprach mit Isang Yun", Der Komponist Issang Yun, Hanns-Werner Heister, Walter-Wolfgang Sparrer (Hg.), (M nchen:text+kritik GmbH,1987), S.290. 1. 머리글 2. 작곡가의 조건들 3. 통영문화와 윤이상의 음악체험 4. 한국에서 윤이상의 5. 윤이상 작품의 특징 6. 윤이상의 작품들 7. 윤이상의 글들 8. 윤이상의 음악사상 과정과 내용 9. 윤이상과 노장사상 10. 맺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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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1. 머리글home.donga.ac.kr/swcho/Text/17/03.pdf · 2004-10-13 · 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1 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노 동 은 1. 머리글 윤이상은

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1

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노 동 은

1. 머리글

윤이상은 삶을 마감하는 1995년 11월까지 78년간을 음악으로 인간과 민족

과 세계를 온 몸으로 살다간 음악가이다. 전반 반평생은 한국에서 살았고,

후반 반평생은 주로 유럽에서 살았다. 1917년에 태어나 1956년 유럽으로 떠

나기 전까지 40여년간의 한국생활기의 윤이상은 일제강점기와 민족분단이

고착하는 시대이었다. 그에게 한국생활기는 ‘민족’이 유린되고 분단되는 비

극적 시기의 중심에서 온 몸으로 살다간 시기로서 그의 작품과 세계관 형성

에 결정적 역할을 한 시기이었다. 그에게 한국생활기는 단순히 살아가는 체

험의 시기가 아니었다. 그가 고백하고 있는 “나의 음악은 조국의 전통에서

샘솟아오르고”, “음악은 인간의 피와 정신이 통하여야 한다”라고 말하는 바

의 그의 음악 모두는 참된 인간성 추구과 민족의 전통에서 샘솟는 바의 한

국에서 살아왔다.1) 이것은 한국생활기가 단순히 작품의 아이디어만을 이용

하는 이국적 태도의 생활기가 아니라, 윤이상의 모든 창조의 근원이 된 생

1) 니시무라 아키라(西村朗), 「無限の宇宙の一端から」, 『尹伊桑-わが祖國, わが音樂』 伊藤成彦

編(東京:影書房,1992), 104쪽; Rainer Sachtleben, Wolfgang Winkler,"Gesprach mit Isang Yun", Der Komponist Issang Yun, Hanns-Werner Heister, Walter-Wolfgang Sparrer (Hg.), (M nchen:text+kritik GmbH,1987), S.290.

1. 머리글 2. 작곡가의 조건들 3. 통영문화와 윤이상의 음악체험 4. 한국에서 윤이상의 삶 5. 윤이상 작품의 특징

6. 윤이상의 작품들 7. 윤이상의 글들 8. 윤이상의 음악사상 과정과 내용 9. 윤이상과 노장사상 10. 맺으면서

Page 2: 1. 머리글home.donga.ac.kr/swcho/Text/17/03.pdf · 2004-10-13 · 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1 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노 동 은 1. 머리글 윤이상은

2 음악과 민족 제17호

활기이었다. 그에게 민족과 조국은 음악 그 자체이었다. 윤이상은 한국생활

기가 유럽생활기에 대한 전반기적 전제가 아니었다. 윤이상의 작품과 그 세

계는 한국생활기에서 형성된 세계관을 일관되게 실천한 음악가이자, 한국음

악의 세계화를 일관되게 추구한 음악가이다. 그만큼, 윤이상의 한국생활기는

후반기 유럽생활기를 포함하여 전 생애에 관통하고 있을 정도로 삶과 예술

을 일관되게 형성한 시기이었다.

이 글은 윤이상이 한국생활기에 어떻게 세계관을 형성하고 작품을 형상화

하였는지를 밝히는 글이다.

2. 작곡가의 조건들

한 창작가가 작품의 질서를 부여하기 전에 음향적 재료를 선택한다. 이것

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 어느 개인이건간에 아이디어로서 음향적 재료

(acoustic materials)를 선택한 끝에 질서를 부여한 결과가 ‘음악’ 창작품이기

때문이다. 창작가의 선택은 열려있으며 자유이다. 그 결과로서 창작품이 ‘소

통’되었느냐라는 명제도 열려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음악역사는 이 명제가 간단치 않음을 반증시킨다. 19세

기 낭만주의 예술과 음악이 교양시민층에 의하여 유지되었으면서도 이들이

예술작품과 저질(Kitsch)음악이라는 서로 대립적인 작품요구로 창작가들은

개인과 사회 속에서 ‘고민’하였다. 20세기는 지금까지의 한 시대적인 성격과

경향에 관한 개념들이 시대정신으로 작용한 역사를 단절시키고 다양한 음악

들을 공존케 하므로서 소통유무는 불분명하여지고 더욱 개별화 하였다.

음향적 재료 선택에서도 자국과 타국의 문화유산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

냐라는 명제도 간단치 않았음을 음악역사는 말한다. 19세기 초반의 독일은

자국의 민요를 선택하여 이후 독일음악의 불가결한 요소가 되면서 유럽적인

음악양식으로 부단하게 발전시켰다. 19세기 중반이후의 러시아 경우, 차이코

프스끼(Pyotr Iliich Chaikovsky(Tschaikowsky))는 유럽적인 당대의 양식을 선택

하는가 하면, 러시아 5인조(the mighty handful)는 러시아적인 음악양식을 만

들기 위하여 자국의 민요를 선택하였다. 20세기 창작가들이 각양각색의 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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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3

적 재료 선택에도 불구하고 유럽적 국제음악과 자국의 음악문화유산 사이에

‘열려진 고민’ 속에서 자국의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유럽주변국에서 증가되

었다.

윌리암스(R.V.Williams 1872-1958), 바르톡(B.Bart k 1881-1945), 「봄의 제

전」의 스트라빈스키(I.F.Stravinsky(Strawinsky) 1882-1971), 야나첵(Leo Jana

k 1854-1928)의 경우가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선택의 증가는 고급 음악문화

에 대한 반작용이나 특수한 음악적 재료선택을 위한 자료수집과 보존의 경

우도 있지만, 야나첵이나 바르톡의 경우는 민족주의 바탕에서 자국의 역사

와 미체험의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쇼팽음악의 폴란드적

요소나 리스트와 브람스음악의 항가리-집시적 요소 등처럼 ‘이국취향적’(異

國風,exoticism) 선택이 아니라 ‘본래적’이라는 점에서 달라 있었다.

음향적 재료 선택이 국제적으로 ‘열려’ 있고, 자국적으로 ‘닫혀’ 있을지라

도 음악역사는 자국적인 ‘닫힘’이 항상 존재해 왔고, 그 ‘닫힘’ 조건 선택에

서 부단하게 ‘열어’ 국제화로 전환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것은 음악이 존

재하는 이유가 지금까지 개인과 사회간의 ‘소통예술’(communicative art)이고,

그것은 자국의 문화유산이 사회적인 포지셔닝(Positioning)으로 작용하여 소

통과 창조의 준거틀이기 때문이다.1) 공통체의 아이덴티티는 수천·수백년간

역사적·미적으로 위상화된 포지셔닝에서 현재화와 세계화를 기획할 수 있었

던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들이 자국의 음악 문화유산을 ‘이국취향적 태도’에서 벗어나 본래적

으로 회복하려고 노력할 경우 누구나 당대에 허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근현대음악사 전개가 서양과 일본음악중심에서만 이루

어졌고, 그 대신 자국음악의 역사와 미학을 학습으로 체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1)

2) ‘포지셔닝’(Positioning)용어는 광고학이나 마케팅론 용어이다. 소비자의 머리 속에 이미 자리잡

고 있는 것을 상품으로 인지시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프로세스를 형성하는 자리매김화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포지셔닝은 한 사회가 역사적으로 이미 자리잡은 음악적 전통에 맞춰 작품

으로 소통시키는 포지셔닝을 가리킨다. Al Rice, Jack Trount, Positioning, 『포지셔닝』 김충기역(서울:나남,1990), 8-20쪽 참고.

3) 노동은, 「한국음악의 제3전환기 선언」, 『한국민족음악현단계』(서울:세광음악출판사,1989), 11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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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음악과 민족 제17호

무릇, 창조적인 에너지로 자국음악을 체험하려고 할 경우, 그 음악들이 역

사적이고도 사회적인 기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또 추상적 개념이 아닌

구체적으로 체험할 때만이 허무감을 치유할 수 있다. 그렇치 않을 경우는

우리들이 그 음악 자체로부터 인간과 사회 관계는 물론 그 역사와 미적 세

계가 ‘은폐’되어 버린다. 은폐된 자리의 그 음악은 자연적인 재료로만 존재

하므로서 물신성(物神性, Fetisschcharakter)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령 그 음악이 호기심을 느낄지라도 근본적으로 ‘이국 취향적 태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욱이, 우리가 타국의 음악학습조차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는 사실을 깨달을 경우에는 그 이국적 태도로 말미암아 허무감만 증폭할 뿐

이다. 이러한 현상이 한반도에 펼쳐진지 이제 백년이 넘었다. 따라서, 우리

시대는 누구나 한국문화에 관한한 ‘이국취향적 태도’에서 자유스럽지 못하

다. 자유스럽지 못함을 자유로움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학습구

조 전환을 전제한다. 이 글은 또한 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을 통하여

창조성의 역사적 기반으로서 한국문화에 대한 새로운 ‘대화’가 모두 열려지

기를 모색하려고 한다.

3. 통영문화와 윤이상의 음악체험

윤이상이 문화적 체험을 하면서 성장한 곳은 통영이다. 통영은 “나의 모

든 예술적·철학적·미학적 전통이 조국에서 생겼다”라고 말하는 바의 조국을

상징하는 고향이기도 하다.1) 그렇다면, 통영은 어떠한 문화적 역사성과 다

양성을 가지고 있었을까?

통영은 경상남도의 남해안에 돌출한 통영반도에 자리잡은 곳으로서 사계

절이 뚜렷한 온대문화권을 형성하며, 삼면이 바다로 부산·여수·진주·마산 등

과 연결되는 도시이다.1) 원래 통영(統營)이란 이름은 군사용어인 통제영(統

4)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 『윤이상의 음악세계』, 최성만·홍은미 편역(서울:한길사,1991),

73-76쪽중 76쪽. 5) 노동은, 「통영, 그 섬에 가고 싶다」, 『음악과 민족』 제9호(부산:민족음악연구소,1995), 127-136

쪽 참고 및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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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5

制營)에서 줄여진 이름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1593년에 초대 통제사로 임명

되어 한산도에 통제영 본거지를 창설한 바 있다. 이것은 해군인 수군(水軍)

대장이 충청도와 경상좌우도 그리고 전라좌우도에 각각 정3품 당상관으로서

수군절도사를 두었지만, 임진왜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충청·경상·전라 3도에

각각 분할된 수군 통수권을 통합하여 삼도통제사로 개편하면서 그 군영(軍

營)이름을 통제영이라고 하였다. 조선수군의 본거지가 된 통제영의 초대통

제사는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그리고 통제영의 본영(本營)이 세병관(洗兵館)

이었으며, 통제영은 이후 303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이 사실은 통영문화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한문문화권으로서 성리학과 정

부의 조선수군의 본거지로서 군영의 제도문화가 자리잡고 있음을 말한다.

통영은 본영의 세병관은 물론 참모들의 작전 상황처인 운주당을 비롯하여

백 여채가 넘는 수많은 부속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그림 1 참고). 물론, 군

악대와 같은 취고수와 세악수들이 속하는 ‘취청’(吹廳)이 있었으며, 기생들

은 ‘기생청’에 속해 있었다. 취청의 경우, 1687년에 100명이었다. 이들은 성

밖에 기거하면서 통제영에 출퇴근을 하였다.

<그림 1> 통영 전도(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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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음악과 민족 제17호

(취청이 오른 쪽 북문의 산줄기 끝에 보인다)

곧, 출근 이후에는 민간음악계로 활동하였으니, 통영은 한양 이외에 가장

많은 음악인들이 집중된 곳이 되었다. 지금도 전통문화로 전해지고 있는 승

전무·통영검무(검기무)를 비롯하여 해군들의 군사퍼레이드인 군점(軍點)과

수군들의 군기제(軍旗祭)라 할 수 있는 둑제가 성행하고 있었다. 정재(呈才)

는 세악수들이, 군점에는 취고수와 세악수들이 동원되고, 이 밖에도 세악수

들이 펼치는 관악영산회상와 같은 대풍류, 가곡·가사 등의 반주음악인 거상

악, 행진할 때의 길군악이나 취타는 물론 회갑연·행차·제향에 이들이 주관하

고 있었다. 또, 향리들 중심으로 시회(詩會)를 통하여 시와 그림 그리고 음

악이 아울러진 가곡시조의 맥이 근대의 통영문학예술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통영은 또한 서민문화가 통영문화의 양대 산맥의 하나로 발달되어 있었다.

통영이 지리적 위치가 삼면의 바다와, 수많은 한려수도의 기점이라는 점에

서 일찍부터 항구로 발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산물과 청과물의 산지

로서, 또 수입와 수출의 집산지로서 부산과 여수 등지의 도서지역과 연결되

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이며, 내륙으로 고성·사천·진주·마산 등지와 연결되는

요지이어서 일찍부터 군사적·정치적 중심지는 물론 경제적·문화적 요지로

부각되는 곳이다. 통영아전들이 중개한 통영의 오광대, 통영사또놀이와 마을

마다 두레풍물에 의한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다.

그리고, 악공조합으로 알져진 신청(神廳)출신들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

는 사실 또한 우리가 주목해할 점이다. 이들은 통제영의 취고청의 악공과

기생청의 기생들을 공급하고 있었다. 신청은 민간종합예술학교와 의례기관

을 주관하는 조선최대의 조직체로서 공사(公私)간의 행사를 주도하고 있었

다. 지금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통제영의 제례악을 이곳 신청출신들이 민간

제례악으로 전해오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통영은 또한 신라시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불교문화가 발달된 곳이었다. 지금까지 안정사와

용화사 그 밖의 암자들이 즐비하게 있으며, 이곳의 초파일 행사는 지금도

통영인들에게 삶의 위안처로 자리잡은 행사가 되고 있다.

통영문화권은 백두대간 문화권에서 지리산을 축으로한 좌도, 또는 동편제

문화권에 해당한다. 즉, 백두대간이 지리산에서 낙남정맥으로 어어져서 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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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7

의 낙동강으로 끝나는 바, 낙남정맥의 아래쪽에 해당하는 문화권이다(그림

2 참고).

<그림 2> 백두대간의 낙남정맥권

이 문화권은 ‘남원-구례-하동-사천-고성-통영-마산-진해’로 이어지는 동편제

권으로 경남의 통영·고성권은 전남의 순천·여수권과 문화교류를 같은 문화

권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윤이상이 음악적 체험을 고백하고 것처

럼 “우리의 가장 음악적인 사람들은 전라도 지방에서 나지요”라는 것은 전

라도 지역의 소리가 낙남정맥과 신청권을 따라 활발하게 교류되고 있음을

뜻한다.1)

통영은 또한 근대에 일찍부터 양악이 발달된 곳이다. 1895년에 통제영이

폐지되고, 1896년에 400명 규모의 고성지방대라는 근대병제로 확립되었으며,

6) Luise Rinser·Isang Yun, Der verwundete Drache, (Frankfurt/M.:S.Fischer,1977); 『상처받은 용』, 앞의

책,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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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음악과 민족 제17호

1899년에 진위 제3연대 3대대로 개편된 지역으로, 통영은 한국근대군제사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바로 이곳 고성지방대에 양악식 군악대랄 수 있는

‘곡호대’(曲號隊)가 경상남도에서 제일 먼저 확립되었다. 악대장인 부교 1명

과 곡호수(나팔수) 10명, 고수 10명 등 21명이 한 대를 이루고 있었다.1) 1896

년 부산이 개항하자 통영도 일본문화가 일본을 통한 서양문화가 급속하게

번져가고 있었지만, 통영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전통문화가 견고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개항이래 정기선 항해회수가 부산보다 거의 두배에 가까왔

다는 점이나 학교와 기독교계가 일찍부터 들어서거나 일본으로 유학하는 등

신문화 또한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곳이 바로 통영이었다. 말하자

면, 한국전통문화예술인과 외래문화예술인들이 모두 통영에 찾아와 온갖 공

연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즉, 통영은 유교문화와 서민문화, 전통문화와 신

문화, 그리고 민족문화와 외래문화가 중첩되어 있는 교차로에서 다양성이

주어진 곳이다.

이 역사적인 현장에 윤이상이 풍부하고 다양한 통영문화를 체험하며 성장

하고 있었다. 윤이상이 『상처받은 용』에서 통영의 음악적 체험으로 말하고

있는 분야는 유랑극단, 판소리, 율방의 향제풍류, 시회(詩會), 남도소리, 통영

오광대, 신청, 답교 등 세시풍속, 초파일의 연등제, 벚꽃놀이 등의 전래문화

와 중국곡예단과 악단이 곁들인 영화관, 그리고 학교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체험한 근대 신문화 등이다.

‘유랑극단’은 그 중심이 19세기말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는 ‘떠돌이

예인집단’들로서 일제강점하에서도 창극과 판소리·가야금병창·남도민요 등

의 성악과 산조나 시나위 등의 기악 독주와 합주, 그리고 풍물 등의 연행종

목으로 이루어진 한국종합예술단을 말한다. 윤이상은 명창 이화중선 등을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한다. 그는 여기에서 들은 「심청전」이 1972년 뮌헨

올림픽대회기간중 창작공연시 소재가 되었을 정도로 판소리에서 깊은 영향

을 받았다.1) 실제로 그는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를 부르고 있었다. 같은

7) 「칙령」 제22호 친위각대편제 개정(1898.7.2), 「칙령」 제2호 진위대·지방대 편제개정(1899.1.15)

를 인용한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Ⅰ』(서울:한길사,1995), 483쪽 이후를 참고. 8) Luise Rinser·Isang Yun, Der verwundete Drache (Frankfurt/M.:S.Fischer,1977); 『상처 받은 용』, 앞의

책, 28쪽; 윤이상, 「명창 이화중선」, 『한양』에 개재한 글을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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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9

한국전통음악을 윤이상은 친척집에서 체험하고 있었는데, 해금과 거문고 등

이 곁들인 줄풍류를 비롯하여 통영지역의 권번(券番)출신들이 초대되어 각

종 민요와 병창 공연 등을 경험하고 있었다.1) 이러한 삼현육각 형태의 음악

들을 윤이상은 “아주 매혹적이어서 그 소리를 잊을 수가 없어요”라고 고백

하고 있다.1 ) 또, 최근까지 지방의 율방에서 이루어진 시회(詩會)를 부친이

주도하고 있었을 때에 윤이상은 시와 초대된 기생들의 영산회상을 비롯한

연행도 체험하고 있었다.1) 부친과 함께 그는 바다 낚시 때에도 ‘남도소리’

를 비롯하여 가족의 제례에 제례악을 들으며 성장하였다.1)

또, ‘통영오광대’의 공연역시 윤이상에게 빼놓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1) 그

리고, 신청집단의 의례에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윤이상은 무당과 무부들의

조직체나 청사(廳舍) 명칭인 ‘신청’(神廳)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있지

않으나, 무당에 대한 체험고백은 신청에 다름 아니다. 통영은 삼면이 바다이

기 때문에 무당굿이 많았다. 통영에서 사흘낮밤동안 주도하는 무당과 무부

들의 굿에서 그는 이 때의 체험을 이후 1971년에 「나모」(Namo)와 1975년

의 「마하야나」로 작품화하였다.1)

윤이상은 또한 세시풍속으로 진행되는 정월달의 연날리기와 4월 미륵산

기슭의 절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초파일 행사에 수천개의 연등과 승려들의

음악소리를 경험하고 있었다.1) 그리고, 5월의 미륵산 기슭과 산등성에 눈부

시게 핀 벚꽃의 축제를 손꼽을 정도로 즐기고 있었다.1) 다른 한편으로, 윤

이상은 중국악기로 연주하는 중국곡예단의 공연과 한국의 양악 악단들이 영

화관에서 무성영화의 막과 막사이에 작은 음악회를 개최한 현장에 있기도

울:창작과 비평사,1998), 100-102쪽에 재개재.

9) 『상처받은 용』, 앞의 책, 28-29쪽. 10) 위의 책, 29쪽. 11) 위의 책, 21쪽. 12) 위의 책, 22-24쪽. 13) 위의 책, 29쪽. 14 ) 위의 책, 30쪽; 한편, 신청(神廳)의 구체적 내용은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Ⅰ』 , 앞의 책

128-175쪽을 참고하시오. 15) Luise Rinser·Isang Yun, Der verwundete Drache (Frankfurt/M.:S.Fischer,1977); 『상처 받은 용』, 앞

의 책, 32쪽. 16) 위의 책,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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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음악과 민족 제17호

하였다.1) 어느 경우는 자신의 작품이 연주되었다고 회상한다.1)

윤이상은 물론, 통영공립보통학교 재학시 음악교과인 ‘창가’시간에 풍금

(리드 오르간)과 노래, 그리고 교회에서 양악을 체험하고 있었다.1) 이 때 익

힌 독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 있었으며, 학교 재학기간동

안 각종 행사 때마다 독창자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1) 윤이상이 학교에서

양악체험을 통하여 수학적 명확성에 매료되어 있었다. 1 ) 그리고, 토오쿄오

(東京) 유학생한테서 바이올린도 공부하였고,1) 축음기로 샬리아핀의 오페라

와 첼로음악 그리고 교향악 작품들을 풍부하게 감상하고 있었으며,1 ) 자작

품이 영화관 소속의 악단에 의하여 연주되기도 하였다.1)

이처럼, 윤이상은 보통학교를 졸업하는 1932년까지 역사적인 한국전통음

악과 새롭게 부각된 근대양악이 교차하는 통영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체험하

며 어린 음악가로 그 꿈을 키워갔다. 그 꿈은 창작가로 나래를 펴는 일이었

다.1 ) 그러나, 음악가로서 윤이상의 나래는 번번히 부친의 반대로 꺾일 수

밖에 없었다. 부친은 “내 아들은 절대로 음악가가 되지 않게 할 것”이라며

단호한 거부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니, 끊임없이 윤이상의 음악가 꿈을 좌절

시키고 있었다.1) 한국에서 악공(樂工)과 같은 음악가는 조선시대 이래 역사

적으로 ‘천민’이었므로, 매매가 가능할 정도로 사회적 신분이 최하위층에 있

었다. 1894년 갑오농민항쟁으로 신분이 철폐되었어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

에게 그 모순이 질곡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양반출신으로 그 이념권에 있었

던 부친은 윤이상의 음악전공을 극력 반대하였다. 이 반대로 말미암아 윤이

상의 음악가로서 길은 이후 수많은 시행착오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시행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윤이상은 일제강점하 민족의 운명과 함께

17) 위의 책, 33-34쪽. 18) 위의 책, 39쪽. 19) 위의 책, 36-38쪽. 20) 위의 책, 38쪽. 21) 위의 책. 22) 위의 책. 23) 위의 책, 39쪽, 41쪽. 24) 위의 책, 39쪽. 25) 위의 책, 40쪽. 26) 위의 책,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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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11

하는 큰 음악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것은 역설적으로 부친이 바

라는 바이었다.

4. 한국에서 윤이상의 삶

우리가 작곡가 윤이상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20세기 현대

음악 진행과정에서 ‘세계적’인 창작가로 한 정점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나 한

국인이라는 사실 보다는, 그의 작품에서 자국의 음악유산을 부단한 창조적

에너지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윤이상은 1917년에 태어났으므로

한국문화유산이 해체되는 6.25까지 생애의 전반부를 민족문화유산이 풍부한

‘통영’에서 살았다는 점이 해방 이후의 세대와는 그 ‘느낌·생각함의 깊이’가

달라 있었으며, 이것을 그의 작품과 글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윤이상의 삶과 예술을 시기로 구분한다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한 시

기는 ‘한국생활’시기로서 1917년에 태어나 1956년에 유럽으로 떠나는 시기

까지의 40여년간을 주로 통영·부산·서울에서 생활한 시기이다. 또하나 시기

는 ‘유럽생활’시기로서 40세가 되던 1956년에 유럽으로 떠나 1995년 베를린

에서 향년 78세로 삶을 마감하는 근 40여년간 주로 독일을 중심으로 생활한

시기가 그것이다. 이 사실은 ‘한국생활기’의 작품과 ‘유럽생활기’의 작품은

양식적으로 분명하게 다른 시기에 있었음을 뜻하지만, 그 작품의 근저는 한

국음악과 그 철학에서 비롯되어 일관되게 이어가고 있었다.

윤이상은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군 덕산리에서 반일적(反日的)

양반출신인 부친 윤기현(尹基鉉)과 농민출신인 모친 김순달(金順達) 사이에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가 호적상으로 경남 충무시 도천동 157

번지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자료 1 참고), 실제로는 산청군 덕산리에

서 세살까지 살다가 이후에 통영의 본가로 와서 호적에 신고되었다. 부친

27) 윤이상의 호적상 모친은 추부규(秋富圭)이었다. 추계(秋溪)가 본이었던 추부규는 1875년 8월

24일 충무 도천에서 태어나 1987년 12월에 윤기현과 결혼하였다. 윤기현은 1942년 4월 27일에 마감하였다. 추부교는 1948년 5월 6일 충무시 도천동 135번지에서 마감하였다. 윤기현과 추부교 사이에 두 딸만 있었기 때문에 윤기현은 산청군 덕산리 출신인 덕산댁 김순달(金順

達)과 만나 2남 3녀를 낳았으며, 그 장남이 윤이상이다. 덕산댁은 호적에 오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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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음악과 민족 제17호

윤기현은 큰아버지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큰아버지 호적에 올라 있었으며,

어장 실패후 가구공장을 하면서도 시회(詩會)에 푹 젖어 있었다. 모친은 통

상 덕산댁으로 통했다. 모친의 부친은 산청에서 동학농민항쟁에 앞서다가

체포되어 고문끝에 폐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부친이 목재를 구하려 산

청에 들렸다가 모친을 만난 것이다.

<사진 1> 부친 윤기현

윤이상은 5살때부터 호상서재(湖上書齋)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호상서재

는 1875년부터 이 충무공의 10세손인 이규석(李奎奭) 통제사가 지방민 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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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13

를 교육시킨 서당이었다. 호상서재에서 공자(孔子)와 노장(老莊)에 관련한

공부를 3년간 계속하였다.1) 특히, 공자와 장자에 관한 공부는 호상서재에만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계속 정진하였다.1)

<자료 1> 윤이상의 주민등록초본

28) Luise Rinser·Isang Yun, Der verwundete Drache (Frankfurt/M.:S.Fischer,1977); 『상처 받은 용』, 앞

의 책, 35쪽. 29) 위의 책, 같은 곳에서 윤이상은 “언제나 난 그것을 읽었어요”라는 고백과 함께 1989년 튀빙

겐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서 행한 강연내용인 「靜中動:나의 음악예술과 바탕」에서 “도교적 원칙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저의 곡들은 道의 표현들입니다···저는 이러한 도교사상을 저버린 적은 없지만”과 같이 생애 마지막까지 노장의 세계를 음악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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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음악과 민족 제17호

호상서재에서 3년간 수학한 윤이상은 8살인 1916년 4월1일에 6년 과정의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32년 3월 23일에 상위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자료2 참고). 학교 다니면서 윤이상은 근처 예배당을 다니며 찬미가와 풍금

을 빠짐없이 배웠다. 보통학교 시절 윤이상은 음악적 재능을 표출하면서 다

양한 예술분야에 체험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다. 통영공립보통학교 윤이상

학적부 기록에 “언어명료하고 자세태도가 훌륭하며 연구심이 풍부한 어린

이”이자 “唱歌에서 특출한 수재로 두뇌가 뛰어난 어린이”로 평가할 정도로

그의 언변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있었다(자료2 참고). 이 기간동안 그는

작곡·바이올린·기타 공부를 하였다. 통영은 전통문화와 개항지로서 신문화가

풍부하게 혼재되어 있는 곳이라서 그는 두 문화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자료 2> 윤이상 학적부의 특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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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15

이처럼 “唱歌에서 특출한 수재”였던 윤이상은 통영의 풍부한 음악유산을

다양하게 체험하며 성장하였다. 이 체험은 후에 음악창작의 창조적 상상력

으로 자리잡는 체험이었다. 13살 되던 때에 그는 작곡가의 꿈을 키워 나간다.

한편, 서당과 보통학교 재학기간이었던 20년대의 통영음악은 학교의 창가나

음악담당 교사와 ‘통영연악회’(統營硏樂會) 그리고 개신교 성가대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1)

보통학교 졸업과 함께 윤이상은 통영협성상업강습소(統營協成商業講習所)

를 2년간 수료하고, 곧 서울에서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의

제자이자 경성방송국 음악관계자이며 오케 축음기상회에 재직하고 있었던

최호영(崔虎永;1901년생)에게 2년동안 화성학 중심의 작곡레슨을 받았다. 1 )

윤이상이 작곡레슨을 받았던 1934-5년간의 서울에는 전업적이고 전문적인

작곡가가 없었다. 일본 토오쿄오의 ‘동양음악학교’출신이었던 최호영도 당시

에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제금가(提琴家)로 알려져 있었다.1)

1930년대 전반기 서울에는 음악평론분야의 김관(金管)·홍종인(洪鍾仁)을

비롯하여 홍난파·계정식·채동선 등의 바이올리니스트와 김원복·박경호·이흥

렬·김영환·김메리·이애내 등의 피아니스트, 김태연·김인수·박태현 등의 첼리

스트, 현제명·안기영·채선엽·권태호 등의 성악가가 악단을 형성하고 있었지

만, 정작 전문 작곡가가 없었다.1) 작곡가 김세형(金世炯;1904년생)은 1928년

이래 미국의 로스안젤레스의 챕먼(Chapman)대학을 거쳐 서부(Westen)대학교

대학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1934년에 수료(M.M.)하여 1935년에 귀국하였으

나 독립운동조직체인 흥사단의 「흥사단가」작곡자로 알려져 조선총독부의

요시찰 인물로 감사받고 있었다. 김성태(金聖泰)는 1935년 3월에 연희전문학

교 상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에 토오쿄오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한 상황이

었다(1939년 3월에 졸업하였다).1) 즉, 윤이상이 최호영으로부터 작곡공부는

30) 서우승, 「음악」, 『충무시지』(충무:충무시지편찬위원회,1987), 1102쪽 참고. 31) 위의 책, 47-48쪽. 위의 책에서 윤이상은 ‘최호영’이란 실명을 밝히지 않고 있다. 최호영 실명

은 윤정모, 『나비의 꿈』 상(서울:한길사,1996), 150쪽에서 밝힌 이름이다. 32) 『音樂評論』 창간4월호(京城:음악평론사,1936), 40쪽. 33) 위의 책, 40-42쪽 참고. 34) 國立音樂大學同調會 編, 『同調會名簿1996』(東京:國立音樂大學同調會,1997), 26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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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음악과 민족 제17호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으므로 2년만인 1935년초에 통영으로 귀향했다.

고향 통영에 돌아온 윤이상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일본에 유학하여

상업학교를 진학할 경우는 음악공부를 해도 좋다라는 부친에게서 허락을 받

았기 때문이다.1) 윤이상은 1935년 4월에 일본 오오사카(大阪)에 있는 상업

학교에 입학하고, 별도로 오오사카음악학원에 등록하여 본격적인 음악공부

를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작곡을 전공하는한편 첼로공부를 하였지만, 2년을

못채우고 귀국하였다. 귀국직후인 1936년 11월 8일에 그는 경성 당주정(唐

珠町) 168번지에 기거를 하며 공업분야에 종사했다. 그리고 새문안교회 차재

명(車載明) 목사가 주례하는 세례를 받았다(자료3 참고).1) 그 세례의 신급은

입교이었으므로 모친이 유아세례를 이미 시킨 것 같다.

<자료 5> 윤이상의 새문안교회 교인확인 명부

35) 『상처받은 용』, 앞의 책, 48쪽. 36) 새문안교회역사편찬위원회 편, 『새문안교회 문헌사료집』 제1집(서울:새문안교회100주년기념

사업회,1987), 3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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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17

1937년에 윤이상은 첫 동요집을 출판하고, 1938년에 통영의 산양면의 사립

학교 화양학원(오늘날의 화양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하였다(사진2 참고).

<사진 2> 화양학원 음악교사 시절

(앞 줄 오른 쪽에서 세번 째)

1940년 신학기에 다시 일본 토오쿄오(東京)에 진출하여 작곡공부를 계속

하는한편 반일지하조직체에서 활동하였다. 작곡선생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

오(池內 友次郞, 1906년생)로서, 그는 일본 최초의 파리국립음악원을 수료하

였다. 그가 1936년에 귀국하여 음악이론과 작곡 그리고 작곡교육으로 활동

하고 있을 때 윤이상이 만난 것이다.1)

37) 이케노우치는 귀국후 일본대학 예술과 교수를 거쳐 2차대전후 東京藝大작곡과 교수가 되어

수 많은 작곡가를 배출하고 이들을 파리음악원에 유학시켜 대성한 음악가로 손꼽힌다. 그는 일본전통의 요곡(謠曲)인 「유야」(熊野)에 기초하여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3개의 소품 「유야」(熊野) 등 대표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이 밖에도 피아노곡, 가곡 등이 있지만, 『和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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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음악과 민족 제17호

그러나, 윤이상은 1941년 태평양전쟁 전운이 일본에서 감돌자 귀국하였다.

1942년 4월에 그의 부친 윤기현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윤이상은 무기

제조로서 독립운동을 계획했다가 1944년 7월에 체포되어 거제도 장승포경찰서

에서 통영으로 이송, 두달간 구금생활을 하였다. 9월17일에 풀려난 윤이상은 또

다시 체포령을 피하려고 서울로 탈출하였고,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통영으로 돌아와 통영공립고등여학교(3년제) 음악교사로 취임하는한편, 시인

유치환·김춘수·김상옥 그리고 윤이상과 동창생이자 「까치의 죽음」 작곡가 정

윤주(鄭潤柱,1918년생) 등과 함께 민족문화 창출을 목적으로 1945년 9월15일에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하여 한글강습회·초등교원을 위한 정서교육강습회·시민

강좌·연극공연·음악회·농촌계몽대 순회공연 및 강연을 하였다.1)

<표1> 통영문화협회의 활동 내역

그는 또다시 통영의 역사적 문화들을‘들어 마시며’ 문예가와 음악가로서

통영출신의 예술가들과 정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통영에 『토지』의

構成音』·『和音外音』·『學習追走曲』 등의 이론서를 저술했으며, 당디(Vincent d'Indy; 1851-1931)의 『작곡법 강의』 등의 역서(2권, 1959,1961)와 저서 『대위법』(1941)를 내기도 하였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 그는 일본현대음악협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의 작품경향은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전통을 충분히 살려 작곡기법의 정확성과 세련미를 추구하고 있다. 馬場 健, 「池內 友次郞」, 『音樂大辭典』 1卷(東京:平凡社,1981), 81쪽 참고.

38) 『1947년판 예술연감』(서울:예술문화사,1947), 162쪽.

소재지 경남 통영읍

창 립 1945년 9월 15일

역 원 대표: 유치환

간사: 윤이상 김혁림 정명윤 김춘수

행 사

1. 한글강습회(5일) 2. 정서교육강습회(1주일간 군내 초등교원 대상) 3. 시민상식강좌(2회) 4. 농촌계몽대 파유

5. 연극공연(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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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19

작가 박경리, 꽃의 시인 김춘수, 깃발의 시인 유치환, 시조와 시로서 풍광을

드러낸 김상옥 등 근대 한국문단의 중심인물과 작곡가 정윤주가 나온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윤이상이 한국생활기에 나온 가곡 작품 중 「그네」와 「편지」의 시인은 김상옥(金相沃 1920- )의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윤이상의 정신적 한 단면을 찾

아볼 수 있다. 김상옥을 비롯한 ‘통영문화협회’ 회원들은 대부분 통영출신의 오랜 동료들이었다. 윤이상은 통영 시내의 초·중·고의 대부분 교가들은 거의

유치환의 작시에다 붙혀진 곡들이다. 김상옥의 경우 <청년문학가협회>에 가

입하여 통영지부를 운영한 바도 있었고, 일찍이 1938년 『문장』지 추천을 받은 후 『동아일보』에 시와 시조와 동시 부문에 당선한 바 있다. 초정(草汀) 김상옥이 일제하 항일운동으로 여러차례 투옥된 바 있어 역시 투옥된 바 있는 윤이상이 비록 3년 선배이었으면서도 서로 민족적인 동지애로 함께 생활

하고 있었던 사이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시학사(韓國詩學史)에 “현대의

시정신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된다는 것을 깊이 터득한 시인”이자 시조부

문에 “홀로 우뚝 솟은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윤이상이 선택한 가곡의 시인들은 한국시사에 뛰어난 서정시로 평가받고 있는 시인들이며, 해방이후 이들 시인들이 대부분 카프류의 프로시에 반대한 민족진영의 시인들이고, 또한 조지훈이나 박목월의 청록파 시인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공감대는 우리 문화의 성격이나 정신성향 그리고 민족전통유산의 뿌리와 줄기를 회복

하려는 부단한 노력들을 통영의 문화성지에서 불을 지피고 있었으니, 윤이

상은 그 지핌으로 후반기의 삶과 예술을 비추며 한국생활기를 지나고 있었

다. 윤이상은 당시 악단의 양대산맥이랄 수 있는 현제명이 주도한 ‘고려교향

악협회’나 김순남이 주도한 ‘조선음악가동맹’에 가입하지 않은 채, 통영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던 사실은 주목할 일이다. 그는 민족적 성향을

띄고 있었지만 해방정국을 비문화적 시대라고 비판하며 정치지향적인 활동

에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1) 통영문화협회 활동시부터 윤이상은 일련의 초기 가곡들을 창작하거나 통영의 여러 학교 교가를 창작하였다(표2 참고). 특히,

39) 『상처받은 용』, 앞의 책,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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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음악과 민족 제17호

이 기간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지어주기 운동은 욕지중학교 교가 작

시자인 김상옥(金相沃, 1920년생)을 제외하고, 주로 통영문화협회 대표이자 ‘깃발’의 시인인 유치환과 함께 전개한 점은 주목할 일이다. 이기간 윤이상은 모두 9개교에 달하는 교가를 작곡하였는데, 통영여중, 통영고, 욕지중, 통영·

충렬·두룡·진남·용남·원평 등 초등학교 교가 작곡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2차대전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산

에서 시립고아원 원장직을 1년간 맡고 헌신하였다.1) 이때 일평생 고생하는

폐결핵을 얻었다. 그는 1947년에 통영을 중심으로 <통영현악4중주단>(윤이

상·鄭潤柱·崔甲生·崔相釬)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등 지역문화발전에 헌신적이

고 정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사진3 참고).1)

<사진 3> 통영현악4중주단

40) 윤이상, 「나와 음악」(1955)에 발표한 글을 재인용한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상(서울:창

작과 비평사,1998), 79쪽 참고. 41) 서우승, 「음악」, 앞의 책, 1103쪽. 단원들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윤이상은 1947년에 탁혁수(제

1바), 최(제2바), 박기영(비)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윤이상의 음악세계』, 앞의 책, 앞의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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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21

그가 1948년에 통영공립여자중학교 음악교사로 취임한데 이어, 곧 바로

부산사범학교 음악교사로 취임하면서 부산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곧 폐결핵

으로 입원하였고 병이 깊어지자 몇달간 통영에서 요양을 하고 10월에 학교

로 돌아왔다(사진4 참고). 이미 9월 신학기가 되어서 교감으로 금수현과 국

어교사로 이수자가 신임으로 부임한 때였다.

<사진 4> 부산사범학교 음악교사 시절

(앞줄 왼쪽 첫번째가 윤이상, 두번째가 금수현)

1950년 1월 윤이상은 부산사범학교에서 같은 교사(국어)인 이수자(李水子,

1927년생)와 결혼하였다(사진5 참고).

<사진 5> 윤이상과 이수자의 결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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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23

결혼 직전에 가곡집 『달무리』도 부산에서 출판하였으며, 주간 『소년 태

양』의 편집국장직도 맡았다. 1950년에 민족비극인 6.25가 일어나자 ‘전시작

곡가협회’ 사무국장으로서 김세형·이흥열·윤용하·김동진·김대현·박태현·나운

영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사진6 참고). 이후 유치진 극본과 연출의 음악·연

극·무용이 한데 어울린 종합공연작품 「처용의 노래」를 작곡하여 국립극장

에서 공연하였다. 1 ) 그리고,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작가 김영일(金英一

1914-1984)과 함께 문교부검인정의 학년별(1-6) 『국민학교 새음악』과 전시

초등학교 노래책 『소년 기마대』의 노래를 1950-53년간에 작곡하여 공동저

작으로 부산에서 발행하거나 발표회를 가졌다(사진7 참고).1)

<사진 6> 전시작곡가협회 회원들(1950)

42)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상, 앞의 책, 62쪽. 43) 한겨례신문, 1998년 10월 30일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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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음악과 민족 제17호

(앞줄 왼쪽부터 박태연, 김세형, 이흥열, 윤이상

뒷줄 왼쪽부터 나운영, 김대현, 김동진, 윤용하)

<사진 7> 윤이상의 『소년기마대』와 『새음악 교본』(1950-1953)

1951년에 부산고등학교 음악교사로 활동하다가 1953년 휴전협정과 함께

그는 서울로 이주하였다. 먼저 양정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잠시동안 있었다.

건강상태가 안좋아지고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서 그 학교를 그만두었다. 1 )

이후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에 출강하여 작곡을 지도하고 독주곡

과 실내악곡과 여러 분야의 평론을 발표(표2 참고)하면서 부동의 음악가로

부각되었다. 1954년에 <전시작곡가협회>에서 새롭게 발족한 <한국작곡가협

회>(회장 김세형)위원으로 활동하거나, 음악회를 주선, 한국작곡가협회의

‘제1회 작곡발표회’(1955.2.26, 서울 시공관)에서 발표한 「현악4중주」, ‘서울

시뮤직펜클럽’ 회원활동(1955, 사진8 참고), 경주예술제(제1회)와 진주예술제

(제5회) 등의 참여, 신문과 잡지에 자신의 논설들을 발표하여 서울생활 3년

44) 이수자, 앞의 책,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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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25

간을 통하여 악단을 이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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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음악과 민족 제17호

<사진 8> 서울시 뮤직펜클럽 회원들(1955)

(왼쪽부터 박태현, 윤이상, 안병소, 이정상, 한사람 건너 이성삼)

기실, 6.25는 음악인에게도 월남과 월북으로 비극을 안겨다 주었다. 남북에

걸쳐 한반도에 광범위한 악단재편이 이루어지자, 윤이상은 부동의 위치에서

한국악단을 주도하고 있었다. 1954년에 윤이상은 일평생의 구상으로서 일관

되게 추구한 대표적인 글,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비롯하여 이 때를 전후

하여 여러 편의 글을 잡지·신문·강연 등에 발표하였다.1) 「화천근방」(1954),

「성악가에게 드리는 고언」(1955), 「진주·경주예술제와 지방예술운동」, 「오

늘의 세계음악」, 「오화섭씨의 작곡평을 박(駁)함」(1955), 「나와 음악」(1955),

「20 청년이 되어서」(1955), 「민중음악에 대한 고찰과 방법론」(1956), 「작

곡계, 발흥기에 도달하였다」(1956)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한국작곡가협회

상임위원이었던 윤이상이 40세 때인 1956년 4월 11일에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제5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사진9 참고).

45) 윤이상, 「악계구상의 제 문제」, 『문예』 제5권 제1호(서울:문예사,1954), 176-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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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음악과 민족 제17호

<사진 9> 제5회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기념 사진(1956)

(앞 줄 한 가운데 모자든 사람이 윤이상과 그 뒷줄로 이수자)

수상직후 윤이상은 <한국음악단체연합회>에 가입하고, 한국작곡가협회·연

주가협회·뮤직 펜 클럽 공동주최의 ‘윤이상씨 도불 환송회’(1956.5.23, 남북

장)를 거쳐 같은 해 6월2일에 예술가로서 정진과 한국음악의 세계화를 위하

여 프랑스 ‘파리음악원’으로 유학한다.1 ) 이로써, 그는 ‘한국생활기’를 마감

하고, 새로운 유럽생활기를 시작하였다. 윤이상의 ‘한국생활기’는 1956년(40세) 유럽으로 떠나기 전의 전반 생애를 한국의 문화유산 속에서 ‘피부적으로 들어마시며’ 온전하게 살았던 시기에 있었

46) 1956.5.12 문총회관(文總會館)에서 한국작곡가협회, 한국연주가협회, 국악협회, 한국교육음악

가협회, 한국관악연맹, 뮤직 펜 클럽 등 6개 간체가 <한국음악단체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최고위원으로 김세형, 안병소, 장사훈, 이흥열, 박태현, 계정식이 선출되었다. 결성목적은 음

악단체의 발전 도모와 복리, 민족음악수립, 국제음악 문화교류 등이었다. 한편, 윤이상의 도

불 환송회는 1956년 5월 23일 남북장(南北莊)에서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 이흥렬, 이정상, 이성삼, 김동근, 이강렴, 임만섭, 김천애, 공선증, 김인수 등 <한국음악단체연합회> 산하의 음

악인들과 동방문화회관 김동근 사장, 시인 김종문 등 40여명이 모였다. 월간 『음악』 6월호, 제2권 제6호, 통권 제11호(서울:국민음악연구회,1956), 69쪽 참고; 이수자, 『나의 남편 윤이상』, 앞의 책,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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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29

다. 그리고, 이 시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시대이자 분단시대이었으므로 ‘피부적으로 들어마신 문화유산’은 언제든지 ‘민족적’일 수 있었다. 윤이상은 전반부 한국의 삶이나 후반부 유럽의 삶이 두 문화를 중층적으로 체험하여 작

품에 반영할지라도 창작의 창조적 에너지는 동양, 특히 자국의 문화유산이었다

는 점에서 우리들의 ‘가능성’을 열어주며 ‘반성’케 한다. 그렇다면, 윤이상 작품

에서 그 문화유산이 어떻게 ‘선택’되었는지를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5. 윤이상 작품의 특징

윤이상 음악이 한반도의 민족전통적인 음악과 음악관을 서양의 현대음악

기법으로 옷을 입혀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음악은 특정 작품의 일부(예컨대,

1987년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Mein Land, mein Volk)를 제외하고

는 전통음악이 그대로 재현되지는 않는다. 50년대 세계현대음악계가 음렬적

사고와 전자음악적 방향이 60년대에 일군의 음색-음향작곡흐름으로 전환하

자 윤이상은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 1933)나 리게티(Gyorgy Ligeti,

1923)와 함께 그 어법 중심적 흐름과 함께 가고 있었다. 다만, 이들과 달리

윤이상은 한국-동아시아의 음악을 영감화(靈感化)하고 그 미학적 세계관으로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한국-동아시아의 음악과 음악관을 영감화하였다는 점은 그의 전

반부 삶의 현장에서 체험한 한국민족전통음악과 학습한 유학(儒學)·노장학

(老莊學)이다. 즉, 그의 핵심적 작품 특징이 ‘음통일체 Ton-Einheit’(음악학자

슈미트의 용어)와 ‘음향통일체 Klang-Einheit’(노동은의 용어)라는 현대음악기

법이어서 이것의 영감적 아이디어가 바로 한국의 음악과 음악관에서 비롯하

였다는 말이다. ‘음통일체’란 어떤 중심음과 그 음을 장식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음들을 말하고, ‘음향통일체’란 이 ‘음통일체’가 하나의 묶음으로

움직이는 음향적인 흐름을 일컫는다.1) ‘음통일체’가 한국전통음악의 ‘선(線)

47) 노동은, 「우리가 찾아야할 윤이상」, 월간 『객석』 12월호, 통권118호(서울:예음,1993), 126-12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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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음악과 민족 제17호

적’인 기화(氣化) 원리를 윤이상의 현대어법으로 적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전통음악의 음악원리가 주목받는 대목이다.1 ) 바로 이 점이 한국과 서

양음악문화의 가교역할을 하는 특징이며, 또 서양전통에서 보면 ‘한국적’이

지만, 한국전통에서 보면 ‘서양적’이라는 점에서 우리들을 ‘낯설게’ 하는 요

인이기도 하다.

윤이상이 한국민족전통음악 관심은 기실 전 생애에 걸쳐 있다. 그가 해방

전후에 창작한 초기 가곡 5곡을 묶어 1950년에 부산에서 가곡집『달무리』란

제목으로 출간하였을 때부터 1994년 「화염에 휩싸인 천사」까지 한국전통음

악은 언제나 살아 쉼쉬고 있었다. 예컨대, 윤이상 자신이 작품특징을 설명할

때 그린 다음의 그림에서 우리는 한국전통음악의 선적으로 기화(氣化)하는

특징을 살필 수 있다.1)

<그림 1> 윤이상이 그린 작품표현

<그림 1>의 설명은 한국전통음악에서 살필 수 있는데, 다음 <악보 1>

의 「청성곡」(淸聲曲)을 <그림 1>과 같이 그의 「플루트연습곡집」을 작

품화하고 있다.

<악보 1> 「청성곡」 첫부분 <악보2> 「플루트연습곡집」 중

에서

48) 노동은, 「음악기학Ⅰ」, 『민족음악의 이해』 3호(서울:민족음악연구회,1994), 45-103쪽을 참고

하시오. 49) 니시무라 아키라(西村朗), 「無限の宇宙の一端から」, 앞의 책,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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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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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음악과 민족 제17호

<악보 1>에서 ‘솔’이 두마디에 걸쳐 중심으로 가고 있으면서도 첫 박이

나 끝 박에서 다른 음들이 꾸며줌으로써 윤이상작품처럼 음통일체를 이루고

있는데, 윤이상의 <악보 2>에서 놀라웁게 같은 꼴로 움직이고 있다. 이 특

징은 그의 1968년 작품인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다음 <악보 3>은 50마디째부터이다.1)

<악보 3>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중에서

위 악보에서 중심적으뢰 움직이는 음은 내림시(B♭")이지만, 이 음을 내기

위하여 맨처음 음에 장식음이 붙혀져 움직이다가 주된 내림시가 강조되고

짧은 장식음들로 흔드는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윤이상의 노장(老莊)의 음악철학관을 발견하는데, 노자

(老子)는 우주만상의 존재와 생명의 조화로움에서 나오는 그 소리이야말로 천지만물이 영원히 생성변화하는 도(道)의 모습이자 대음(大音)이지만, 이 대음은 들리지 않는, 곧 ‘대음희성’(大音希聲)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자(莊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상태에서 그 대음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우주

간 자연존재와 생명의 위대한 하모니를 ‘함지지악’(咸池之樂)으로 ‘음악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1)

따라서, 윤이상은 함지지악을 유럽의 현대기법으로 위의 <그림 1>로서 표현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서 한국음악은 창작의 소재로 적용되

고 있지만, 작품용어에서도 윤이상은 부단히 한국과 동양권의 역사적인 용

어들을 활용하고 있다. 「가곡」·「가사」·「율」·「가락」·「피리」·「바라」

·「무악」·「견우와 직녀」·「광주」·「나의 땅, 나의 조국」 등의 용어가 그

50) 노동은, 「윤이상의 음악세계」, 고 윤이상선생 음악추모제의 발제글(고 윤이상선생추모제 준

비위원회 주최, 월간 객석 후원, 1995년 12월 18일 문화일보홀, 오후3시)에서 예시한 악보이

다. 51) 이 음악관은 ‘윤이상의 음악철학관’ 항목에서 다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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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33

것이다.1) 무엇보다도 윤이상 작품은 한국과 동양의 음악철학관으로 계기화

되었음은 주목할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윤이상 작품은 어떠 한가?

그가 1935년 일본 오오사카(大阪)에 있는 <오오사카음악학원>에 제출한

작품이 비조성적 무조음악인 바이올린 4중주를 제출하기도 하였고,1) 1956년

에 서울시문화상을 받은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3중주」 작품이 있지

만, 오늘날 ‘초기가곡’과 몇 편의 교가와 동요 그리고 합창곡들을 제외하고

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의 전 생애에 발표한 작품 중 ‘초기 가곡’이 현대기법이 아닌 선법적이라

는 점에서 결코 ‘낯설기는커녕 낯익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전반부 ‘한국생활

기’ 작품과 후반부 ‘유럽생활기’의 작품사이를 잇게 한다. 그리고, ‘초기 가곡’

이 한국의 전통적인 음악유산과 연결되어 있고, 4-50년대의 당대 한국창작가들

(예컨대, 안기영·김성태·채동선·김순남·이건우 등)과 서로간의 영향을 주고 받

아 균형적 질서를 유지케 하기도 하였다. 즉, ‘초기 가곡’이 없었다면, 우리들

에게 그의 음악은 ‘주변적인 가치’로만 평가받을 수 있었겠지만, 있음으로해서

한국음악역사의 ‘중심권’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으며, 그의 후반 작품들이 더

욱 그 중심권의 역사적·미적 평가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 윤이상의 작품들

‘윤이상의 한국생활기’에서 창작된 작품들은 물론 몇 개의 가곡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13살 되던 통영공립보통학교 5학년 재학시에 “나도 내

음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며 뜻을 둘 때부터 창작의 열정은 끊임없이

타올랐다.1) 그리고 이 해 1930년에 몇 개의 악기로 작곡한 가벼운 음악이

우연찮은 경로로 통영극장(영화관)에서 무성영화 상연 막간에 악단에 의하

52) 노동은, 「우리가 찾아야할 윤이상」, 앞의 책. 53) 『상처받은 용』, 앞의 책, 48-49쪽. 54) 이수자, 앞의 책,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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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음악과 민족 제17호

여 연주되었다.1) 첫 작품 공연이었다. 이를 확인한 윤이상은 작곡가의 길로

나가는 일이 운명처럼 여겨졌다. 윤이상 작품은 1938년의 「화양학원가」(華

陽學院歌)를 필두로 각 학교 교가류, 가곡집 『달무리』에 나온 다섯 개의 가

곡, 합창곡 「낙동강」·「충무공」(1950, 정인보 시), 1951-52년간의 동요 「아

기방울」·「졸업하는 날」 등 70여곡, 「첼로소나타 1번」·「현악4중주 1번」

·「피아노 3중주」 등이 있다. 발표한 글로는 1954년에 발표한 「악계구상의

제 문제」, 1955년의 「성악가에게 드리는 고언」, 1956년의 「민중음악에 대

한 고찰과 방법론」과 「작곡계, 발흥기에 도달하였다」 등이 있다. 이것을 정

리하면 다음 <표 2>와 같다.

<표 2> 윤이상의 한국에서 창작한 작품들

55) 위의 책. 한편, 1930년대는 영화상연시 스크린 뒤에서 효과음악을 연주하거나 막간 사이에

간단한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나 소규모의 악단들이 조직되어 있었다. 통영에도 트럼펫 2, 클라리넷 1, 트롬본 2, 작은 북과 큰 북이 각각 하나씩을 비롯한 밴드가 영화관에 전속되어 있었다. 『충무시지』(충무:충무시지편찬위원회,1987), 1102쪽 참고.

창작연대 교가 및 동요 가 곡 합창곡 독주 및 실내악곡 비고

1930 첫 작품(경음악) 통영영화관의 악단이 연주

1937 첫동요집 출간

1938 화양학원가

1945 해방직후

통영여중·통영 고 등 교가류 (총9개교)

통영여중, 통영고, 욕지중, 통영·두룡·진남·용남·원평 등 초등교가

1941 편지

1947 그네(추천)

1948 나그네, 달무리, 고풍의상

충무시민의 노래

충무시민의 노래는 작곡연대 불명

1950 가곡집 『달무리』

충무공 고풍의상, 달무리, 그네, 편지, 나그네 등 5곡

1950 낙동강

1951-3 동요 아기방울 외 70여곡

1953 첼로소나타 1번 이 해에 초연

? 피아노3중주

1956 현악4중주 1번 이 해에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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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35

<표 2>에서 1951-3년간의 동요 70여곡은 1998년 10월에 발굴된 것으로

주로 초등학교 음악책에 수록된 동요들이다.1) 문교부 인정 국민학교 『새음

악』 1-6학년분 6권과 서울의 건국사에서 전시 국민학교학교 『소년 기마대』

(1951) 등에 게재된 동요들이다(사진 7 참고).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작가인 김영일(金英一 1914-1984)의 작사에 붙혀진 동

요는 「아기 방울」·「오리 병정」·「꼬마 위문대」·「부엉이」·「졸업하는 날」

·「따리아 아가씨」 등이다. 권당 20여곡이 실려 있고, 모두 100여곡중 윤이

상이 작곡한 동요는 70여곡이다.

김영일 작사와 윤이상 작곡의 6학년용에는 「풀피리」·「산넘어 저쪽」·「나

가자 소국민」·「시골의 여름」·「해바라기」·「하늘의 용사」·「무궁화 훈장」

·「고향생각」·「잃어버린 노래」·「귀뚜라미 우는 밤」·「연못」·「감사합니

다」·「졸업하는 날」 등 13곡이 실렸다. 전시국민학교 『소년 기마대』는 1951

년 서울 건국사에 발행한 음악교과서로 역시 김영일 작사에다 윤이상 이외

에 윤용하·나운영·박태현·김성태 등의 작곡가 작품 24곡이 게재되었다. 이

중에서 윤이상 작품은 「아가 병정」·「날아라 소년항공기」·「반디야 반디

야」·「산골동네」·「등대불」 등 5곡이다.1)

56) 한겨레신문, 1998년 10월 30일자. 이 날 기사에서 『새음악』과 『소년 기마대』를 발굴제공한

바 있는 아동문학가이자 통영중학교 연구부장인 김철민선생을 만났다. 그의 부친이 윤이상 작곡의 노래들을 작시한 김영일(金英一)이었다. 김영일은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작가로서 당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사무차장을 맡고 있었으며 1984년에 삶을 마감하였다. 현재 김철민

선생은 아동문학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본 글에 게재되는 악보는 김철민 교사의 호의로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한편, 김영일은 전시하에 부산에서 작곡가 윤용하와 같은 집에 함께 기거할 정도로 돈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윤이상 이외에 작곡가 박태현,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박화목 등과 부산동요시대를 열어갔다. 박화목, 『보리밭 사잇

길로-윤용하 일대기』(서울:범우사,1986), 103쪽 이후 참고. 57) 「따리아 아가씨」 등을 작사한 김영일은 ‘제1회 김영일 전시동요발표회’를 1953년 4월 27일

부터 5월 1일까지 부산의 동아극장(오전 10시)에 가짐으로써 전시기간동안 동요작가로서 확

고한 지위를 가졌다. 이 발표회는 <전시동요보급회>가 주최하고 대한민국 문교부·내무부·공

보처·대학교수단·부산시·대한부인회·각 신문사 등이 후원하였던 바, 동요 작곡가로 윤이상과 더불어 박태현과 윤용하 등이 발표하였다. 이 발표회에 발표한 윤이상 동요는 「반디야 반디

야」와 「꼬마위문대」, 「날아라 소년항공기」, 「오빠사진」, 「백두산 태극기」 등과 동요

극 「봄이 오네」 중 노래 부분 일부를 작곡하여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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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음악과 민족 제17호

다음 <악보 4>는 윤이상·김영일 엮음 국민학교 『새음악』 3학년용에 나

오는 「따리아 아가씨」이다. 이 노래 역시 김영일 작시와 윤이상 작곡으로

게재되었다. 전통음계에다 ‘따리아 아가씨’의 부끄러움 이미지를 네마디씩

한 호흡단위( 3/4×4맏’)로 가락을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게 노래한다. 두

도막형식으로 통일시킨 이 노래는 『새음악』 전체의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

이다.

<악보4> 따리아 아가씨 김영일 시 윤이상 곡

윤이상의 교가는 동요 다음으로 유달리 많은 분야이다. 해방직후 통영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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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37

협회와 통영공립고등여학교-통영공립여자중학교에 재직하며,1) 1949년 부산사

범학교 음악교사로 떠날때까지 근 4년간 통영에서 유치환·김상옥 등과 함께

‘교가 지어주기 운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윤이상 작곡의 교가는 통영

여중, 통영고, 욕지중, 통영·충렬·두룡·진남·용남·원평 등 초등학교 교가 등 현

재 확인된 교가는 9개교에 이른다. 다음 <표 3>이 9개교의 교가 정보로서,

학교마다 그 특색을 살려서 만들었다. 이들 중 초등학교 모교인 「통영초등

학교 교가」(악보 5)와 「통영여자중학교 교가」(악보 6)를 예시한다.

<표 3> 윤이상 작곡의 교가들 (가나다순)

<악보 5> 통영초등학교 교가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

58) 윤이상이 해방과 함께 음악교사로 취임한 3년제 통영공립고등여학교는 1946년 9월1일자로 학

제변경에 따라서 6년제 ‘통영공립여자중학교’로 변경되었고, 1950년에 통영여자중학교로 교명

이 개편되었으며, 여기에서 통영여자고등학교가 1951년에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학교 교가명 작사자 형 식 마디 조 성 박자 첫마디

두룡초등학교 교가

용남초등학교 교가

원평초등학교 교가

유영초등학교 교가

진남초등학교 교가

충렬초등학교 교가

통영초등학교 교가

욕지중학교 교가

통영여자중학교 교가

통영고등학교 교가

유치환

유치환

유치환

유치환

유치환

유치환

유치환

김상옥

유치환

유치환

세도막형식(축소)두도막형식

세도막형식

세도막형식(축소)두도막형식

세도막형식(축소)세도막형식(축소)세도막형식(축소)세도막형식(축소)세도막형식(축소)

20 16 24 22 16 20 22 20 20 20

다장조

다장조

바장조

내림나장조

다장조

사장조

다장조

바장조

바장조

내림마장조

4/44/44/44/44/44/44/44/44/44/4

못갖춘마디

갖춘마디

갖춘마디

갖춘마디

갖춘마디

갖춘마디

못갖춘마디

갖춘마디

못갖춘마디

못갖춘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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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음악과 민족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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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39

<악보 6> 통영여자중학교 교가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

윤이상의 가곡은 계면조(고풍의상,달무리,편지,낙동강)와 평조(그네,나그네)

의 사용음계, 4분의 3박자나 8분의 6박자로 구성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두

맏’(마디)씩의 호흡구간을 취하여 ‘장단성’을 지향하고 있다. 또, 대부분의

노래가 시어(詩語)의 운율적 자귀로 말미암아 노래(가요) 형식을 이루는 악

절들을 각각 확대 시키고 있다. 윤이상은 「낙동강」(악보 8 참고)처럼 전통

적 장단감이나 선법을 충실하게 반영시키려는 경우도 있고, 대부분을 전통

적 재료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자의적 해석에 충실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전통적 재료를 소재화 시키고 있다.

화성처리에서도 윤이상은 한국선법을 음계화한 화성이나 서양식 화성체계

를 절충(편지, 달무리 등)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한국화성을 모색하고 있

다. 실제로는 「현악4중주」처럼 4도와 5도의 화성과 증감화음을 썼지만 그

것은 부분적이고 대부분 기능화성법에 충실하면서도 민요조로 표현하는 노

력은 끊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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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음악과 민족 제17호

윤이상이 스스로 1941년이라고 작곡연대를 밝힌 「편지」에서 전통적인 ‘떠

이어’기법 적용과 민악(흔히 민요처럼 민속악이라 부르는) 장단의 적용, 또

선법을 음계화하여 그 구성음을 화성화 시키려는 노력들이 서양식 기능화성

화 속에서 돋보인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작곡연대가 가지는 역사성과 작곡

기법상의 위치를 다른 창작가들과 비교할 수 있는 ‘비상히 주목되는 작품’

이다. 다음 <표 4>는 윤이상 초기 가곡의 구성요소들이고, <악보 6>은

피아노 반주에서 떠이어 기법이 정형화된 가곡 「편지」의 첫 부분이다.

<표 4> 가곡의 구성요소들

<악보 7> 「낙동강」 이은상 작사

윤이상 작곡

창작연대 곡 명 작사자 형 식 박 자 주요 화성

1941 편지 김상옥 ABA'가 확대된 노래형식 6/8 민악장단적 한국·서양 절충

1947 그네(추천) 김상옥 AB로 된 노래형식 6/8 민악장단적 한국음계화성

1948 나그네 박목월 ABA'가 확대된 노래형식 6/8 장단적 한국음계화성

1948 달무리 박목월 ABA'B'로 확대된 노래형식 3/4 한국·서양 절충

1948 고풍의상 조지훈 ABCDB'로확대된 노래형식 6/8 민악장단적 한국음계화성

1950 가곡집 『달무리』, 위 가곡 「고풍의상」 「달무리」 「그네」 「편지」 「나그네」 등 5곡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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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41

<악보 8> 「편지」 1-10 마디 김상옥 작시

윤이상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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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음악과 민족 제17호

「편지」의 노래부분에서 전통적인 라음계에 바탕을 두고 가사를 굿거리

장단에 맞춰 처리(8분의 6박자 한마디를 다음 마디와 대비해가며)하는 선율

기법화며, 두마디째 피아노반주에서 떠이어 기법으로 처리하려는 윤이상의

의도는 자신 뿐 아니라 양악의 한국화 방향성을 ‘앞당겨’ 읽어볼 수 있는

고민의 결과이다. 노래 부르는 성악인들은 이러한 특징 때문에 한국전통음

악과 선적, 율동적, 색채적, 발성적인데까지 ‘대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미적

요구를 윤이상은 열어 놓은 것이다.1) 윤이상은 후에 반주도 “가능하면 가야

금이나 거문고 또는 북같은 우리 전통악기들이 피아노에 대신”할 수 있기를

바라기조차 하였다.1)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작품이 1941년에 나왔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홍난파류의 작품을 차치하더라도 안기영의 한국음

악론을 진일보시키고, 김세형이 1934년의 「뱃노래」와 1941년의 「찢어진 피

리」에서 장단·선율·화성(홍난파식 3화음을 극복한)·장식(떠어, 떠이어 등) 등

59) 윤이상,『윤이상 초기가곡집』(평양:윤이상음악연구소,1990),‘이 책을 내면서’쪽 참고. 60)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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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43

의 영향권에서 사회적으로 미적 합의성을 도출하고 있는 연대이기 때문이

다.

이 사실들은 양식적으로 ‘민족적’인 작품에 관심을 보여온 동 시대의 창

작가들, 예컨대 선배격인 안기영(1900년생), 채동선(1901년생), 안익태(1906년

생), 김세형(1907년생), 이흥렬(1909년생), 김성태(1910년생), 그리고 윤이상과

동년배격인 김순남(1917년생)을 비롯하여 이건우(1919년생) 중에서 동년배들

의 창작기법과 맥을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한다. 홍난파(1898년생)에 의하여

한국음악의 화성화 문제가 제기되고, 안기영에 의하여 민족형식(가락·장단·

화성 등의 형식적 구성)이라는 양식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한국음

악의 화성사는 김세형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서양음악의 기능화성이 중심적

이었다. 화성 자체도 민족적이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김순남·이건우에 의

하여 제기되고 40년대 전반기에 벌써 작품으로 구체화하고 있었다. 즉, 윤이

상은 이러한 흐름과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윤이상이 동시대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김순남과 동시대인들이 이러한 문제의식과 작품경향은 이들이 30년대 중

반이후 일본유학을 통하여 비조성(a-tonal)음악을 익히고 있었고, 이 때가 일

본 역시 ‘일본적 음악’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또 이들이 일제 식민지하의 조

국에 대한 민족의식이 뚜렷하였다는 점에서 서로간의 영향이 삼투(渗透)된

결과라고 보야야 할 것이다.1)

그러나, 김순남이나 이건우와 달리 윤이상 작품이 한국생활 기간에 소통

이 잘 안된 이유가 있다. 해방공간시기(1945.8.15∼1948.8.15)에 민족음악 실

천 진영에서 벗어나 고향인 통영을 중심으로 활동한 점(유치환처럼)과 이

시기에 가곡류 말고는 대중적인 노래(‘해방가요’ 등)가 없었다는 점, 한국

악계(樂界)에 뚜렷하게 부각된 시기가 1950년 6.25 이후인데다 1956년에 서

양으로 떠나 있었고, 1955년 향성회(響聲會, 대표위원 韓圭東)편으로 『한국가

곡집』 제1집에 윤이상의 가곡작품 「고풍의상」과 「추천」이 게재되어 성

61) 윤이상은 1935년 일본 오사카大阪 음악학원에서 작공공부 당시 무조적 양식으로 창작한 바

이올린 4중주 작품을 제출한 바 있다. 윤이상의 초기 가곡에서 작품의 기법적 민족화 경향

은 앞선 선배 김세형의 영향을 받았다. 또, 윤이상의 「낙동강」의 경우 13맏’부터 반주 스타

일과 같이 김순남의 「산유화」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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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음악과 민족 제17호

악인들에 의하여 노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1) 1967년 직후 소위 ‘동베를린

사건’으로 누구나 그를 ‘꺼렸기’ 때문에 불통(不通)의 잠복기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이상의 한국생활 작품들이 가지는 역사적·미적 위

치는 유럽생활기의 작품에서 나타난 창작 아이디어를 매개하고 있는 정신이

나 소재적 재료가 원숙할수록 그 매개체가 민족유산(이국 취향적인 태도가

아닌)에서 비롯하였다는 점에서 역(逆)으로 한국생활기의 작품과 동시대의

작품은 물론 민족전통의 전 작품간에 균형과 가치를 획득하여 재조정을 요

구하는 위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이미 그 정신과 소재적 재

료 체험을 충분하게 하고 있었으며, 이를 작품에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 윤이상의 글들

윤이상이 악단에 중진으로 부각되면서 강연이나 신문·잡지를 통하여 비평

활동을 전개한 글들은 주로 1953년 서울에 진출하여 1956년에 유럽으로 떠

나는 직전까지 발표했다. 다음 <표 5>가 그것이다.

<표 5> 윤이상의 1954-56년간 강연과 음악비평 글들

62) 원 곡명 ‘그네’이다. 한편 이 가곡집은 출간 이후 한국가곡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1950

년 6.25 직전에 부산에서 출간한 그의 가곡집 『달무리』는 전쟁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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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45

(* 비고란의 미상은 신문과 잡지의 출전이 현재 밝혀지지 않았음을 표시하나, ‘미상’ 다음의 숫자는 이수자, 앞의 책의 쪽 수를 가리킨다. 그 쪽 수에 본문들이 다시 게재되었다)

<표 5>처럼 윤이상이 1954년부터 강연이나 신문·잡지 등에 발표한 글 수는 10편이 넘는다. 작은 편수이지만 하나같이 그 시대의 문제의식과 방향

성에 관한 음악비평과 음악정책적인 제시를 하고 있다. 이 10편 중 가장 중

요한 글이 말할 나위 없이 「악계 구상의 제 문제」이다.1) 이 글은 1954년에 발표된 것으로 그의 한국생활기는 물론 유럽생활기를 포함한 전 생애의 음

악예술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단초를 이룬다. 이 글이 1954년 만의 한국음악

계의 제 문제와 관련한 진단이 아니라 그의 이후의 삶과 예술이 무엇을 지

향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글은 악단 용어의 성격, 시대의식 문제, 한국음악의 수립문제, 국악의 처우문제, 세계로 통하는

63) 윤이상, 「악계구상의 제 문제」, 『문예』 제5권 제1호, 서울:문예사, 1954, 176-181쪽. 이 글

에 대해선 노동은, 「새로 발굴한 윤이상의 50년대 글과 노래」, 『민족음악의 이해』 제3집 (서울:민족음악연구회,1994), 325-341쪽의 발표를 참고하시오.

발표연대 논 제 및 출 전 비 고*

1954 「악계구상의 제 문제」, 『문예』 제5권 제1호, 서울:문예사, 176-181쪽

1954 「화천근방」(華川近方), 『새벽』, 1954년 송년호. 미상,79-82.

1955 「성악가에게 드리는 고언」, 월간 『음악』 창간호, 서울:국민음악연구회, 47-48쪽.

1955 「진주·경주예술제와 지방예술운동」 미상,68-69.

1955 「오늘의 세계음악」(문화학술강연) 미상,69쪽.

1955 「오화섭씨의 작곡평을 박(駁)함」, 『경향신문』, 19955년3월16일자. 72-77쪽.

1955 「나와 음악」 미상,78-79.

1955 「20 청년이 되어서」 미상,82-84.

1955 「1955년도 국내 악단의 회고」 강연

1956 「한국적 대중음악에 대한 고찰과 방법론」, 문교부·국민개창운동추

진본부 공동주최, ‘왜색풍 가곡 배격 계몽강연회’

연,1956.3.7. 시공관

1956 「작곡계, 발흥기에 도달하였다」, 월간 『음악』 4월호, 통권 제9호, 서울:국민음악연구회, 1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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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음악과 민족 제17호

문제, 좋은 후진의 문제 등 6가지 항목으로 한국전 악단의 좌표계를 진단하

고 있다. 모든 항목에 ‘문제’라는 용어를 붙혀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는 한국악단에 대한 뚜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윤이상이 제안한 문제의식, 악단의 철학 부재와 한국인들의 지지 없는 악

단형성이 문제이어서 서양음악 일변도로 치닫는 한국악단이야말로 이를 반

성하고 한국음악을 수립하여야 세계화가 궤도에 오를 수 있음을 진단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윤이상은 ‘시대의식의 문제’에서 급속한 세계음악계의 역

사적 변천과 달리 우리 악단이 고전시대의 음악만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 자

체가 민중들에게 특정 미감을 심는 폐해일 뿐 아니라 모방 일변도이므로 이

를 ‘시대의식과 비판이 이루어져서 독창적인 자기 이디엄에 의한 노선화’로

극복하여야 함을 역설한다. 이러한 이디엄은 결국 ‘우리 음악의 수립’임을

분명하게 한다. ‘한국음악의 수립’도 역사적 기반인 전통음악, 곧 ‘국악’과

대화하여 독자적인 음악이 나오고, 연주가들이 대중과 중개하여야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한다. ‘국악의 처우문제’는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과 발전책으

로 전통음악 전분야의 채집과 새로운 기보법 창안, 음량을 과학적으로 접근

한 국악기 개량, 국립국악원의 역할 제시를 하면서 한국음악수립이 바로

‘국악 시스템의 발전’에 있고, 이 수립이 한국악단의 시대정신으로 삼을 때

만이 세계로 통할 수 있음을 간파한다. 그리고 ‘세계로 통하는 문제’는 선진

음악의 흡수, 작품과 연주가의 교환이나 유학생의 파유 등으로 세계음악기

구에 가입하여야 세계의 인식을 같이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끝으로 ‘좋은

후진의 문제’는 음악의 법(기초악리, 발성 등)만으로 교육하는 교육방법을

검토하고, 후배 세대들에게 기회를 주어서 한국악단을 공영(共榮)의 발전으

로 나아가길 희망하고 있다. 실제로 이 글을 발표한지 3년만에 윤이상 자신

이 문제해결을 위하여 1956년 ‘불혹의 나이’(40)에 유럽으로 유학하는 결단

을 내리고 있음은 우리를 주목시킨다.1)

64) 윤이상의 도불 환송회(1956.5.23,남북장)에서 윤이상은 ‘인생의 내리막 고개에 몸과 마음을 염

려하고 가족을 걱정’하는 나이인데도, 가르치고 작곡에서 자신의 미흡을 통감하고, 또 세계

와의 호흡과 그 격차를 극복하기 위한 희망으로 유학을 결심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한국

적인 것을 살리며, 조국에 대한 애정과 나라에 대한 책임감을 잊지 않으며, 한국의 음악도로

서 본분을 지켜 사명의식에 충실하며 오직 성의와 노력에 일관”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자기화 시킨다. 이수자, 앞의 책,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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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47

1954년의 「화천근방」(華川近方) 글은 경기도 화천지역의 중부전선(1112

부대)를 방문하면서 느낀 소감을 수필로 밝힌 글이다.1) 화천지역에서 초가

을 들녘의 애상에 잠긴 윤이상은 전쟁중에 생겨난 이 지방출신들의 고아들

에게 부대 장교들이 봉급을 쪼개어 돕는 일에 감동하며 여러 동요와 자장가

를 불러주면서 “햇자락은 포탄 박힌 이 산하에서 서서히 빛을 거두어가고

있었다”로 매듭지으며 감회에 젖는 글이다. 그는 이미 부산에서 고아원 원

장으로 전쟁고아들에게 헌신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1955년 윤이상의 「성악가에게 드리는 고언」은 음악지 출판사업가인 이강

렴이 1955년 8월호로 창간한 월간 『음악』에 개재한 글이다.1) 윤이상은 성악가들에게 작품의 양적인 측면에서 풍부하게 공급되지 않았고, 질적으로도 예술가곡이 드물다는 점에서 성악가들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리임에도 불

구하고 성악계와 한국악단을 위하여 ‘고언’(苦言)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을 시평적 성격으로 제언한다. 일반적으로 성악인들이 사회와 대중들 사이에 상

호소통되는 음악으로 중개하지 않은데다 「오 솔레미오」 등의 특정 곡목으

로 일관하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하며, 또 자신도 잘모르는 가사를 덮어놓고 원어식으로 노래부르는 것이나 독보력 부족이 현대음악접근을 가로막는 태

도가 모두 극복해야할 과제라고 고언한다. 특히, 한국작품을 접근함에 있어

민족문화의 정체성 바로알기 하나로서 한국의 모국어 어법에 의한 발성법 확립과 모국어의 묘미체득, 그리고 한국음악 표상법의 음악적 요소의 탐구, 시와 시인의 깊은 연구가 충분히 고려하여 한국사회의 동태(動態)와 대중들

의 미감을 예술로서 창조하는 공급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고언하고 있다. 윤이상의 1955년 글 「진주·경주예술제와 지방예술운동」은 본인이 제5회 진주와 제1회 경주예술제에 참여하여 지역문화예술운동의 방향을 전개한 글

이다.1 ) 중앙과 지방의 정책 실행자들이 적극적인 지원과 학생중심에서 성

인중심으로 전환요구, 예술제 못지 않은 학술발표와 연예물의 확립 되어 지

방 문화인들이 문화의 꽃을 피워 지방 정치의 생명을 부여하여야함을 개진

하고 있다.

65) 「화천근방」(華川近方), 『새벽』 1954년 송년호의 글을 재개재한 이수자, 위의 책, 79-82쪽. 66) 윤이상, 「성악가에게 드리는 고언」, 월간 『음악』 창간호(서울:국민음악연구회,1955), 47-48쪽. 67) 윤이상, 「진주·경주예술제와 지방예술운동」(1955)을 게재한 이수자, 앞의 책,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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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음악과 민족 제17호

윤이상이 1955년 진주와 경주예술제에서 이루어진 문화학술강연인 「오늘

의 세계음악」은 그 내용이 현재 밝혀지지 않고 있다.1) 같은 해, 음악평론활

동까지 전개한 오화섭(吳華燮)이 한국작곡가협회 제1회 작품발표회를 『동아

일보』 3월9일자에 비평한 「고갈된 창작정신-한국작곡가협회 제1회 작품발

표회를 보고」 글에 대하여 윤이상이 같은 해 3월16일자 『경향신문』에 「오

화섭씨의 작곡평을 박함」이란 제목으로 반비평을 하였다.1)

윤이상은 <한국작곡가협회>의 대표적인 회원 8명(이상근·김대현·나운영·김

동진·김세형·윤용하·이흥렬·윤이상)이 신작초연을 발표한 것 자체를 ‘고갈된

정신’으로 비평한 오화섭의 양식문제, 음악창작의 완성이 이론적 근거로 성

립되었고, 오히려 이론의 자가확립이 더 시급한데도 오화섭이 “대부분이 이

론의 노예였다”고 지적한 것은 잘못이라며 작곡가 1인씩 거론하며 오화섭을

반비평한다. 특히, 윤이상은 이 글에서 “예술이 사상의 누각이 아니다, 전통

의 미에 토대를 두고 현실에 철하고 또한 미래에 항구성을 띠지 않으면 안

된다”를 거듭 밝히면서 앞서 「악계구상의 제 문제」에서 진단한 문제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확인한다. 윤이상은 자신이 이 때에 발표한 작품 「현악4중

주」가 “대부분 평이한 3화음만으로 되어 있고 조성도 탁한 선율”이라며, “우

리는 먼저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현악곡 수법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고 한

오화섭에게 “냉정히 현실을 관찰하고 대상의 사정에 통달하고, 그리고 가급

적 따뜻한 호의가 떠오르면 좋다”라고 충고하며, “전문적 견해에는 거리가

멀고 대상을 정확히 파악지 못함”을 지적하며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

음악의 수립에 한줌의 흙을 더하려는 호의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음악비평을

한 오화섭에게 윤이상은 시대의식과 미의식의 당대과제를 인식하고 있지 못

한채 비평활동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비평활동으로 더욱 유명해졌지만, 짐짓 윤이상은 한국음악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풍향계 역할을 하면서 정열적인 활동을 이 해에 전개하고 있었

다. 1955년에 그는 「나의 음악」이란 발표지 미상의 글을 통하여 자신의 성

68) 윤이상, 「오늘의 세계음악」(1955)을 언급한 이수자, 위의 책, 69쪽. 69) 윤이상, 「오화섭씨의 작곡평을 박(駁)함」, 『경향신문』 1955년3월16일자. 이수자의 위의 책,

70-77쪽에 오화섭과 윤이상의 비평문 전문이 재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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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49

장과정과 지금까지 활동상황을 고해하듯 토로하고 있다.1) 아주 짧은 글이지

만, 윤이상의 정신적 편린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주목되는

글이다. 통영공립보통학교 3학년 재학시 사범출신의 음악선생으로 독보력을

확립하게 된 사실이나, 토오쿄오(東京)에서 ‘매일신문 음악 콩쿠르’에 첼로곡

제출할 즈음 강력한 민족운동의 학생클럽에 투신할 때여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일이며, 고향에서 평생 고질을 얻은 육신의 시련, 해방정국의 혼탁,

부산시립의 고아원장이 되어 사회사업을 했던 일과 그 일로 모략중상을 받

아 실망했던 일, 동족에게 실망하고 사회악이 번져갈 때에도 변함없이 음악

과 민족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의 세계를 수사없이 토로하고 있다.

1955년에 또하나의 윤이상 글은 「20 청년이 되어서」이다.1) 새해에 젊음

을 돌이킬 수 없는 나이 40이 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족적을 회고하

며 생애의 반을 꺾은 지금 앞으로 40년의 반을 자른 20년을 교육과 사회와

국가에 바치는 일과 나머지 20년은 매년 5년마다 교향곡 창작 4곡, 매년 실

내악 2곡씩 40곡을 쓰는 비장한 결심이 있기 때문에 새해에 20세의 청년으

로 등장할 것을 약속하는 글이다. 그는 실제적으로 20세의 청년으로 살겠다

는 약속은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실천하였다. 교향곡 5곡, 실내교향곡 2곡

을 비롯하여 실내악 40곡을 훨씬 웃도는 수많은 장르에 걸친 창작활동을 하

였으며 교육과 사회와 민족과 인류를 위하여 온 삶을 점철시켰다.

윤이상은 1955년 12월 17일 동방문화회관에서 「4288년도 국내악단의 회

고」를 발제하였다.1) 이 날 이성삼·이정상·박태현과 함께 악단 각분야의 회

고와 「4289년도 악단의 전망」에 이흥열·안병소·이영세 등이 참여하였다. 뒤

에 윤이상이 「4289년도 악단의 전망, 작곡계, 발흥기에 도달하였다」를 『음

악』잡지에 발표한 것으로보아 실제 발제는 사정상 뒤바뀌어진 것 같다.

윤이상은 1956년 3월 7일에 서울 시공관에서 문교부와 <국민개창운동추

진본부>와 공동주최로 ‘왜색풍 가곡배격 계몽강연회’를 통하여 「한국적 대

70) 윤이상, 「나와 음악」을 재게재한 이수자, 위의 책, 78-79쪽. 71) 윤이상, 「20 청년이 되어서」가 재게재된 이수자, 위의 책, 82-84쪽. 72) 윤이상, 「4288년도 국내악단의 회고」, 『음악』 1월호, 제2권 1호(서울:국민음악연구회,1955),

65쪽의 악단동향 기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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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음악에 대한 고찰과 방법론」을 발제하였다.1) 이 글은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적인 가곡이 쇠퇴하여가는 경향에 비추어 각 방면에 외색풍 가곡추방과

우리나라 가곡의 장려와 보급성과’ 등이 언급되었는데 윤이상의 본문 글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윤이상은 1956년 6월 유럽으로 떠나기 직전에 「작곡계, 발흥기에 도달하

였다」를 마지막으로 발표하였다.1) 이 글에서 그는 작곡계가 버들에 물오른

발흥기가 도래하였음을 희망 속에서 전망한다. <한국작곡가협회>가 제2회의

작품발표회를 준비하고 있고, <한국음악협회>는 작곡상을 제정하는 등 창작

가들에게 창작의욕을 자극하는 것은 물론 기성 작곡가들의 해외 유학과 신

인들의 상설적인 작곡발표회, 잡지사(음악)의 신인등용기회제공, 가곡집 출

간과 더불어 방송편성, 연주가들의 레퍼토리화, 영화음악분야에 창작가들이

진출하여 작품화 하는 현상 등에서 윤이상은 작곡계의 인프라 스트럭처를

확인하고 있다.1 ) 그는 이러한 작곡계 발흥기에 작곡가들이 먼저 이념확립

73) 윤이상, 「한국적 대중음악에 대한 고찰과 방법론」, ‘왜색풍 가곡배경 계몽강연회’(1955.3.7, 시

공관); 이 날자에 ‘왜색가곡 추방계몽강연회’에 관한 것은 『음악』 4월호, 제2권 4호(서울:국민음악연구회,1956), 7쪽 화보와 69쪽의 ‘국내음악뉴스’란을 참고하라. 다음과 같은 음악인들

이 강연을 하였다. 현제명, 「대중음악의 필요성」; 나운영, 「왜색유행가란 무엇인가」; 박태

현, 「왜색노래와 우리 대중」; 윤이상, 「한국적 대중음악에 대한 고찰과 방법론」; 김광섭, 「왜

색노래와 한국민요에 대한 비판」; 이흥열, 「국민가요와 명일의 국민」. 74) 윤이상, 「작곡계, 발흥기에 도달하였다」, 월간 『음악』 4월호, 통권 제9호(서울:국민음악연

구회,1956), 11-13쪽. 75) 윤이상이 작곡계를 발흥기로만 본 것이 아니다. 6.25이후 악단 전체에 걸쳐 새로운 조직과 활

성화가 이루어져 악계 재편이 자리잡아가는 시기에 이 글을 발표하였다. ‘민족음악의 창작 및 발전을 목적으로 창립’한 서울작곡클럽(김세형회장)이 이미 1955년 12월 9일에 서울대학

교강당에서 제1회 작곡발표회를 하였다. 연희화성학회의 제2회 작곡발표회가 1955년 12월 2일에 연희대학교 소강당에서 개최되었다. 1955년 12월 17일에 한국음악가협회(회장 서울대학

교 음악대학장 현제명)에서 ‘대한민국음악가협회 작곡상’을 제정하여 매년 1월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제1부의 오페라,오라토리오, 칸타타분야, 제2부의 교향곡,협주곡분야, 제3부의 실내

악, 합창·중창분야, 제4부의 독주곡, 독창곡분야 등 20분 이상의 작품을 요강으로 냈다. 1956년 1월 8일에는 대구에서 대구음악가협회도 발기인회를 대최하여 회장에 하대응 등이 선출되고, 부산에서도 김점득·조두남·제갈삼 등이 참여한 <부산뮤직클럽>이 결성되는 등 는 등 전국적으로 악단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56년 2월 11일에는 이화여자대학 강당에서 동 대학원의 이영자 작곡발표회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도 1956년 6월 12일

에 동 대학교 강당에서 송해섭·정우현·강석회·오동일·황철익·엄기돈 등이 발표한 제1회 작곡

발표회를 개최하였다. 1956년 5월 12일에는 <한국음악단체연합회>가 문총회관(文總會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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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51

을 해야한다고 역설한다. 정신적 배경으로서 한국민족으로서 문화적 자각이

앞서야 하는데, 이것은 한국전쟁에서 비롯한 민족문화의 해체와 구미식의

사고방식과 생활감정의 확산은 물론 해외의 작품과 표현기술상의 차이와 극

복 등을 음악 뿐 아니라 한국예술계가 학제적인 협력 속에서 문제인식과 방

향성을 설정할 때 가능함을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이상은 동시에 <한

국작곡가협회>의 김세형·이흥렬·박태현·김동진·김대현·나운영·이상근·정윤주·

한상기·윤용하·정회갑·이호섭 등 중진 작곡가들 자신에 대한 개별적인 과제

를 안겨 준다. 그리고, <한국음악가협회>가 모처럼 제정한 작곡상이 한국음

악수립의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영속적 실현, 지역의 후진 등용과 이를 이

끌어낼 수 있는 조직체의 출현요망, 사회적 시설 기반의 불비를 극복하기

위한 강습회, 통신교육, 외국서적의 공급 등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윤

이상은 이러한 발흥기에도 변함없이 이론적이며 이념적인 토대가 견고할 수

있도록 거듭 작곡계에 요망한다.

8. 윤이상의 음악사상 과정과 내용

8.1 네 과정 한국에서 1917년부터 1956년까지 40년간의 윤이상 삶은 일제강점기와 분

단의 민족현실과 함께한 음악가로 존재한다. 이 존재성은 그가 이론과 실천,

그리고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자신의 사상적 뿌리를 세운 음악가로 자리잡

도록 한다. 이 특징은 그 어떤 음악가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이 뿌리를 유럽권에서 체계화 하므로서 자신의 독자성을 일관되게 발전시켰

다. 일제강점기와 분단시기의 한국양악인들이 일반적으로 민족적 현실을 떠

난 채 일본과 구미를 무차별로 모방하고 있었고, 한국근현대사가 동시에 20

세기 전 세계의 제국주의와 냉전체제로서 과제인데다 인간과 세계와 우주간

의 부조화가 현대음악계에서도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철학관과 음

한국작곡가협회, 한국연주가협회, 국악협회, 한국교육음악가협회, 한국관악연맹, 뮤직 펜 클

럽 등 6개 음악단체를 연합하여 결성하였다. 최고위원으로 김세형·안병소·장사훈·이흥열·박

태현·계정식이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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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그만큼 독자성을 드러내면서 동서양의 가교역할과 ‘음악을 통한 세계

통합의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1)

한국에서 그는 독자적인 사상의 뿌리를 세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탐구하고

방황하였다. 네 번에 걸쳐 전환기를 이루면서 음악과 사상을 통합시켜 나간

뿌리이었다. 첫번 째 시기는 음악 자체의 열정적 추구시기이었다. 이 시기중

아동기에 그는 서당에서 유학(儒學)과 노장학(老莊學) 학습하였고, 한국토속

적인 문화와 불교 세계를 경험하면서도 유아세계를 받은 그가 기독교 교회

를 다녔다. 기독교는 청년기에 새문안교회에서 입교로 세례를 받을 정도이

었다. 음악적 뿌리도 전통의 아악과 민악이 풍부한 통영에서 다양하게 경험

하면서도 학교와 교회 그리고 극장과 축음기를 통하여 양악을 익혔다. 당시

양악이 전반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양악경험은 소명

의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음악에서 특출한 수재로 두뇌가 뛰어난 어린

이’이자 ‘악보를 보고 노래 부를 수 있는 유일한 학생’이라고 평가와 자평은

양악에 관한한 자긍심은 물론 점차 작곡가로 운명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음악에 대한 윤이상의 정진은 26세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유학·노장학이나

불교와 기독교가 창작에 그 자체로 표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때의 윤리

성과 세계관들이 후에 크게 영향을 미칠정도로 발전된다.

두번째 시기는 민족운동에 투신하면서 민족주의의 뿌리가 형성된 시기이

다. 28살에 해방을 되찾기까지 윤이상은 음악공부를 하면서도 일제강점하라

는 민족현실앞에 음악을 포기하고 항일운동을 하였다. 음악 뿐만 아니라 가

정도 포기하고 평생고질이 될 정도로 건강도 이 시기에 헤쳤다. 통영이 일

찍부터 이순신의 전적지인데다 1919년 3.1운동이 격렬했던 곳이고, 일본에서

유학한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민족운동을 전개된 곳이어서 윤이상은 이들과

함께 민족현실로 뛰어 들었다. 1 ) 실제로 그는 일본에서 ‘매일신문음악콩쿠

르’에 제출하려고 첼로곡 준비했을 때에도 <민족운동서클>에 투신하여 ‘조

국을 일본식민지에서 해방되게 하자고 맹세’하고 귀국한 것도, 고향에서 동

료들과 폭탄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거나, ‘불온사상의 우리 가곡’으로 총독부

76) Frankfurte Rundschau(1995년 11월 6일자)를 소개한 『한겨레신문』, 1995년 11월 9일자 15쪽. 77) 윤이상, 「아-派」, 『한양』 게재(출전 미상)를 재게재한 이수자, 앞의 책, 108-111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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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53

장승포경찰서에 체포되어 2개월간 감옥에서 고문을 받은 것도, 모두 현실을

껴안으며 민족과 함께 살으려고 몸부림친 윤이상의 진실이었다. 제2기를 윤

이상은 ‘정치’로 보았다.1) 그것은 정치의 핵심적 개념이 한국 ‘국가’가 제국

주의의 일제에 의한 강점에서 국가와 민족이 모두 자유와 정의 그리고 번영

과 민주주의가 체계적으로 왜곡되고 억압받고 있는 ‘현실’에서 윤리적 책임

문제로 윤이상이 나섰기 때문에 바로 ‘정치’였다. 이러한 문제인식으로 그는

이 시기의 민족현실 앞에서 음악의 존재이유를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었지만,

끝내 음악이 민족현실에 앞서지 않했다. 자신의 음악성취보다 민족의 사회

윤리에 민족운동을 통해서 정치를 수행하고 있었다.

5선상에 음부(音符)를 기입하는 것이 너의 최량의 길이냐?1)

이 물음은 음악과 현실 속에서 음악을 포기하고 현실에 온 몸으로 뛰어들

었던 한국생활기의 윤이상 독백이다.

세번째 시기는 해방직후부터 1953년 휴전 시기까지 9년간의 시기로서 계

몽운동을 포함한 사회사업 현장에서 헌신한 시기이다. 해방정국의 이념대립

을 ‘순수한 정치의식’에 살아온 윤이상으로는 ‘실망’하고, 자신의 ‘순진한 정

치의식’의 결단으로 계몽운동을 포함한 사회사업에 온 몸으로 살아갔다. 1 )

해방직후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음악회·야학·아동교육·연극·한글강습회

등 계몽운동에 뛰어든 것도, 부산에서 전쟁고아들 속에 묻혀 사회사업으로

헌신할 때에도, 대한민국정부의 전시작곡가협회와 동요와 교가 보급 활동,

어린이들을 위한 주간지 편집국장(소년 태양) 생활 등 모두가 그 활동의 결

과이다. 이 시기에 그는 음악을 통한 사회사업으로 ‘순진한 정치의식’을 실

천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 곧 「그네」(추천,1947)·「나그

네」(1948)·「달무리」(1948)·「고풍의상」(1948) 등의 작품을 썼으며, 이 가곡

들을 묶은 가곡집 『달무리』(1950)를 펴낸 것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의 선

택은 사회현실이었으며 정치이었다.

78) 윤이상, 「나와 음악」, 위의 책, 78쪽. 79) 위의 책, 79쪽. 80) 위의 책,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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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음악과 민족 제17호

그러나 동족에 실망할 때 사회악이 날로 퍼져나가는 것을 목격할 때, 나의 행동

적인 의분은 나에게 가끔 반문한다.1)

이 시기에 동족에게 실망하고 사회악이 번지는 현실에서 그의 ‘의분’은

행동으로 옮겨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스스로를 반문했다. 음악창작행

위가 가장 최선의 길인지가 그 반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반문의 갈등 속에

서 번민하고 끝내 사회의 정의 쪽을 선택하고 있었다. 이처럼, 윤이상은 민

족사회적 정치윤리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 길이 개인적 윤리보다 민족적

인 사회윤리의 문제들에 책임적인 참여를 통하여 그는 민족현실을 끌어안

고 있었다.

네번째 시기는 1953년에 서울에 진출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는 1956년

6월까지 3년간의 시기로서 ‘음악으로 돌아와 음악의 진실에서 활동’하는 시

기이었다. 실내악 작품들을 이 시기에 초연되거나 한국작곡가협회 위원활동,

대학에서 작곡지도, 10편이 넘는 음악비평활동과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등

작곡가로서 한국악단에 중진으로 활동하였다.

지금까지 두번 째, 세번 째 시기의 정치나 사회사업은 모두 창작의 존재

이유를 위한 자신의 정신적 순례의 과정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첫번째

시기의 ‘음악’을 다시 회복하고 지금까지 ‘정신적 순례과정’이 음악의 견고

한 사상적 바탕이 되어 자신보다 더 큰 인간과 민족에게 음악의 정신을 안

겨다 주려는 자신의 진실을 발견하고 있었다. 윤이상의 유학을 떠나기 직전

인 1955년에 고백한 내용이 그것이다.

나는 다시 음악에로 돌아갔다. 최초에 생겨난 이 가지를 다시 가꾸어 이제는 꽃봉

오리를 볼때쯤 되었다. 그러나 제2, 제3의 가지는 항상 나의 가꿈을 바라는 상태

에 있는 것을 자신은 안다. 이런 정신의 순례(巡禮)는 진리를 찾는 과정이었고 5선상에서 악상을 압축하고 다시 방대한 세계를 응시하는 순간은 진실 그것이다.1)

81) 위의 책, 79쪽. 인용문에서 ‘동족에 실망’했다는 내용은 구체적으로 윤이상이 언급하고 있지

는 않지만, 부산시립의 고아원장을 맡고 있을 때 미군원조이 물질을 둘러싸고 이권쟁탈과 모략중상을 받고 ‘천직’으로까지 여겼던 그 직을 내동댕이 친 내용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

다. 82) 위의 책,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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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55

자신의 음악행위가 현실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어 포기했던 제2,3기가 이

제는 모두 사상의 기틀이 되어 음악의 주권을 회복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언어로 말이다. 그가 작품에서 민족적 정서를 모색하는 것도 현실과 음악

사이를 좁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음악과 근대양악 사이도 좁히는 방황

이자 대화이었으며 탐구이었다.

8.2 음악사상관 한국에서 윤이상은 네 번의 전환기적 삶을 살면서 ‘현실·역사 ·미의 인식

과 표현’을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실행하였다. 그는 2기와 3기에 음악을 버

리고 현실과 함께 했을지라도 결코 음악 그 자체를 포기하지 않했을 뿐만

아니라, 그 때의 인식과 실천이 자신의 독자적 음악세계관을 성숙화 시키려

는 끊임없는 추구가 있었다. 그에게 현실인식과 실천은 자신의 윤리성 뿐만

아니라 음악의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이었다.

제2기에 그는 “한민족의 황민화의 현실로 보아 젊은 혈기로서 도저히 5선

상에 음부(音符)를 기록하고 태연할 수가 없었던” 현실로 인식하고 있었

다.1 ) 그가 태어난 1917년 자체시기가 일제의 무단정치로 억압받던 시기이

고, 제2기에 해당하는 30년대 중반이후 시기는 일제가 병참기지화와 황민화

정책을 전개하며 민족을 해체하는 시기이었다. 이러한 민족현실을 외면하면

서 창작에 전념할 수 없었던 윤이상은 이 시기에 민족항일운동을 전개하였

던 것이다. 제3기에도 윤이상은 “부산 시내를 우글거리는 귀환동포의 버림

받은 싹 들”을 보고 고아원장이 되어 헌신하거나 동요와 교가 창작보급운동

은 물론 어린이를 위한 출판에 손을 댄 일도, 또 계몽적인 문화활동도 모두

정의와 공통 선을 추구하므로서 자신보다 사회적 윤리기반에서 책임을 지려

했던 그의 몸부림이었다. 설령, 그가 제4기에 음악으로 되돌아와 창작에 전

념할 때에도 그의 현실인식은 더욱 분명해진다.

A. 성악가는 가장 많은 대중을 접할 수 있는 점에서는 모든 예술인의 선단에 서

게 됩니다. 사회대중의 시시각각으로 변동하는 동태는 그 사회조직의 반사경

입니다. 여기 성악가의 임무가 앞서는 데 한국의 성악가는 무엇보다도 계몽적

83) 위의 책,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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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음악과 민족 제17호

인 역활을 더 메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현실적인 사회현상에서 자신들

의 감각이 적중치 않고 있지 않는가. 다시말하면 사회를 관찰하고 공부할려는 캄믄쎈스의 의욕이 등한하지나 않은가?1)

B. 먼저 우리 작곡계는 이념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여기서 한국전쟁이란 한 큰 사실은 여태까지의 형성된 한국적인 선천성에 변질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으리만큼 심각했다. 게다가 급속도로 밀려들어온 구미식의 사고방식과 생활

감정, 또 하나는 선전제국의 작품수준을 소화해야할 표현기술상의 문제-이런 것은 한국작품의 생산의식의 근원을 좌우하는 문제로서 당연히 논의되고, 또 조속이 진리가 발견되지 않으면 안된다.1)

C. 그러나 우리나라의 악계는 민중의 지지가 없다. 민중에게 심각히 영향준 예가 없고 민중 역시 음악의 필요를 표정으로 내어본 적이 없다. 또 민중의 수에 비해 희소한 음악전문가들은 대부분 각자의 기량발전에 관련이 적은 직업에 처해 있다. 이러므로 예술가로서의 본래의 자기사명의 수행은 극히 만완하다. 그 다음은 이 공막(空漠)한 사회의 신경은 여간하여 반응이 없다. 아직 음악예

술의 질과 이데올로기 문제를 들어 시비 논란해 본 적이 없다.1)

A에서 윤이상은 한국의 성악가들이 ‘사회대중의 시시각각으로 변동하는

동태의 현실적인 사회현상을 관찰하고 공부’하고 있지 않았고 보았기 때문

에 한국의 현실을 떠난 ‘백년 하청격으로 「오 쏠레미오」나 「라돈에 모삐

레」 등 특정 음악만으로 부르는 현실’이야말로 대중을 얕잡은 행위하고 본

다.

B에서 윤이상은 한국작곡계가 이념도 확립하지 않은 채 모방으로 그치고

있는데다, 한국의 모든 ‘한국적 선천성에 변질’을 가져온 6.25의 심각성과

급속도로 밀려든 구미식의 사고방식과 생활감정, 선진제국의 작품 수준과

격차가 있는 수용의 질 등이 문제로 부각된 현실로 보고 있었다. 이 모든

인식이 ‘한국작품의 생산의식의 근원을 좌우하는 문제’로 인식한다면 공개

적 논의와 정체성을 가진 방향성이 주어져야 극복할 수 있음을 확인시킨다.

C에서 윤이상은 악계가 사회와 민중의 지지가 없고, 예술의 질과 이념문

제를 논의하지도 않는 악계야말로 예술가로서 자기사명의 수행이 ‘극히 만

84) 윤이상, 「성악가에게 드리는 고언」, 앞의 책, 47쪽. 85) 윤이상, 「작곡계, 발흥기에 도달하였다」, 앞의 책, 11-12쪽. 86) 윤이상, 「악계구상의 제문제」, 앞의 책,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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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57

완’(慢緩)한 현실이야말로 악계부진을 가져온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현실인식은 그가 제2기의 정치수행과 제3기의 사회사업을 실천할

때에도 음악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제4기에 음악 자체로 돌아왔을지라도

음악사회의 현실을 저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제4기는 현실이 음악이었

고, 음악이 현실이었다. 윤이상에게 그 현실은 작품세계를 창조하는 한 인간

으로서의 겪는 세계와 마주침이고, 그것은 개인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끊임

없이 민족사회의 공동체 속에서 음악의 정체성(正體性)으로 발전시킨 세계

관이었다. 끝내 윤이상은 그 현실 속에서 찾아낸 화두가 ‘한국음악의 정체

성’이었다. 그것이 세계음악이라고 믿으면서 그는 한국을 떠난다.

한국음악의 정체성 확인을 한 윤이상은 악단이 한국의 현실을 떠난 채

‘서양음악에 의존’하는 사회라고 역사인식을 하고 있다. 한국이 서양음악에

의존적이고 모방적인 시대에 있다고 그가 인식한 분야는 어느 특정분야가

아니라 악단 전체에 걸친 것으로 인식한다. 50년대 한국의 창작분야에서 서

양이 20년대 전후로 자유스러운 무조성에 의한 12음기법 체계화 시기를 보

내고 50년대부터 음렬음악이나 우연음악 등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에서 ‘무조주의에의 소수의 관심’이 있을지라도 서양과 3,40년 차이가 있고,

‘시대의식에 초연한 모차르트나 베토벤’ 등 특정음악만을 연주하는 연주계

는 물론, 성악계가 「오 솔레미오」나 「라돈에 모삐레」(여자의 마음) 등 만

으로 ‘한결같고’, 또 언어의 묘미와 함축성에 정통하지 않은 채 ‘덮어놓고

원어식’으로 부르는 문제이며, 현대음악을 외면한 채 쉬운 온음계적 독보력

으로 일관하고 있는 성악계, 그리고 악단 전체가 ‘한국작품’을 외면하고 있

는 것은 모두 ‘한국에서 시대적인 역사인식’의 결여로 비판하고 있다.1)

즉, 자기 정체성을 잃은 초현실적인 입장에서 무차별적으로 서양음악을

답습하고, 그것 역시 시대의식이 결여된 특정음악만을 추종하는 한국 악단

이라고 인식한 윤이상은 언제나 그 중심에 ‘한국음악의 정체성’ 수행이 당

대의 역사라고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결여가 바로 윤이상이 지

적하고 있는 ‘이념 또는 이론 또는 사상의 결여’가 음악가의 큰 과제로 표

87) 본 문맥의 따옴표들은 윤이상의 위의 글인 「성악가에게 드리는 고언」·「작곡계-발흥기에 도

달하였다」·「악계구상의 제문제」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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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음악과 민족 제17호

현하고 있으며, 그것이 창의성 부진이 바로 악계의 부진으로 본 이유이다.

윤이상은 이 과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음악계의 영위는 다분히 서양음악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것을 그 본바탕인 서구 제국(諸國)과 시대적으로 비교하면 약 60년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인접한 일본과도 3,40년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중략)···그 시대의 사회조직의 일

원인 예술가는 그 민중에 대해 시대계발의 책임을 지고 있다. 무릇 예술은 어느 시대이고간에 그 시대의 산물이요 민중은 자기세대의 감수력과 사고력을 타고나

는 것인데 민중에게 어느 한 시대의 예술을 편식시키는 것은 마치 흐르는 물을 한군데 고이게 하는 것과 같이 고루와 교착과 부패를 가져올 뿐이다.1)

윤이상은 예술이 당대의 산물이어서 당대 한국인들의 ‘감수력과 사고력’

과 함께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특정 문화권인 서양음악 중에서도 특정시

대만을 ‘의존’하는 것이 시대의식의 결여이고, 의존의 성격은 ‘지금 무비판

적으로 시대의 발자취만 충실히 밝고 따라나가 어느 한 시대에만 머물어 버

리는’ 성격이어서 그 결과야말로 ‘고루와 교착과 부패를 가져올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가 당대의 역사인식으로서 확인한 ‘한국음악의 정체

성’은 무엇인가? 한국인이 수천년동안 역사적 기반이 된 한국음악과 ‘대화’

하여 창조적인 미의식 획득이 한국음악의 정체성으로 보았다.

A. 우리가 처해있는 정신적인 배경은 첫째 한국민족으로서의 자각일 것이다. 수

천년동안 내려온 한민족의 고유한 생활감정과 독특한 호흡, 이것이 빚어낸 섬

세한 미의식-이것은 한국작품의 모태일 것이다.1) (밑줄은 필자)

B. 이상을 요약하면 한국음악수립의 근본요소는 많이 작곡되고 많이 연주되고 많이 대중에게 접촉되어야 할 것이다. 이 많이 작곡되는데 있어서의 정신적인 근원은 國樂에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이 國樂시스템의 발전은 한국음악수

립의 좋은 계시와 부단의 영양으로서 동화될 것이다.1) (밑줄은 필자)

C. 첫째 민족적인 개성이란 무엇인가 이 정체의 파악이 급선무입니다.1)

88) 윤이상, 「악계구상의 제문제」, 앞의 책, 177쪽. 89) 윤이상, 「작곡계, 발흥기에 도달하였다」, 앞의 책, 12쪽. 90) 윤이상, 「악계구상의 제문제」, 『민족음악의 이해』 3, 앞의 책, 336쪽. 91) 윤이상, 「성악가에게 드리는 고언」, 앞의 책,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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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59

D. 예술은 사상의 누각이 아니다. 전통의 미에 토대를 두고 현실에 철하고 또한 미래의 항구성을 띠지 않으면 안된다.1) (밑줄은 필자)

E. 이 민족의 대변자들은 그들의 민족이 독점했던 재원을 확대하고 미화하여 세

계시장에 방출했는데 오늘날 고가(高價)한 이들의 민족적 상품은 그의 문화적 배경과 보편성으로 오늘날 세계음악으로서 군림하고 있다. 좀더 시야를 넓히

면 오늘날 인류가 소유하는 세계음악을 통털어 분류하고보면 그 작곡자의 국

적과 민족, 즉 그들의 전통과 체취 속에서 산출되지 않은 음악은 거의 없다해

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1)(밑줄은 필자)

윤이상은 창조적인 한국음악의 역사와 미의식으로 수행해야할 정체성은 먼저 ‘전통과 대화’였다. 그것이 창작가나 연주가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친 시대적으로 풀어야할 과제이고, 정신적이고도 이념적인 배경임을 전제한다. 전통이 “수천년동안 내려온 한민족의 고유한 생활감정과 독특한 호흡”이자 “민족적 개성”이므로 ‘한국민족으로서의 자각’과 그 ‘정체의 파악’이 전제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전통과의 부단한 대화의 계기가 “섬세한 미의식”이 획득되어 ‘한국음악의 수립’이 비로소 열려질 수 있다고 보았다. 윤이상은 물론 한국음악수립이 ‘한국전쟁으로 한국적인 선천성이 변질’되고 구미식의 사고방식과 생활감정이 급속도로 밀려오는데다 구미의 수준과 상당히 간격이 있고 모방 일변도로 일관되기 때문에 악계부진의 음악현실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한국음악의 정체성과 대화는 “한국작품의 생산의식과 근원을 좌우하는 문제”이므로 “당연히 논의되어야 진리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1)

여기에서 윤이상은 해방공간의 화두인 ‘민족음악수립’이란 용어보다는 ‘한국음악수립’이나 ‘國樂’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해방공간의 민족음악

론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50년대에 ‘민족음악

론 논의 중지’라는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에 동조하고 있는 것에 앞서서 자

신의 ‘순수한 정치의식’과 해방공간의 민족음악론 제창자들과 차별성을 두

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국악’(國樂)이란 용어사용도 ‘한국음악’과 혼

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의 역사적인 음악으로 국한할 때 차

92) 윤이상, 「오화섭씨의 작곡평을 박함」, 앞의 책, 73쪽. 93) 윤이상, 「악계구상의 제문제」, 앞의 책, 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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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음악과 민족 제17호

별성을 두고 사용하고 있다. 끝내 윤이상은 한국음악의 정체성이 한국음악수립으로 나타낸다. 여기에

서 윤이상은 한국음악에 관한 부정적인 양악의 악단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적 인식을 스스로 불식하려고 한다.

A. 일반으로 한국음악이라고 하면 대개는 마치 시대의 유물인 아악이나 속악조

를 농(弄)하여 일종의 골동취미에 잠기는 것 같이 속단하는 성급한 친구들이 있으나, 이것은 위험한 착오다.1)

B. 첫째 민족적인 개성이란 무언인가 이 정체의 파악이 급선무입니다. 토속적인 것은 야비하다고 돌려 버렸읍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를 우리의 생활에서 구

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이 천시 유산도 우리의 감정에서 구축할 수는 없읍니다. 생각컨대 속악의 멋과 아기자기한 것, 또 구수한 사설 여기에 아악의 청아와 신비 이런 것이 현대적인 지성에 로과되어 나온것이 예술적인 형태로 등장할 수 있는데 우리의 임무는 존재하는 것입니다.1)

C. 이것은 음악의 문제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계예술의 공통의 숙명

속에 허덕이고 있는만큼 작자와 예술가들은 협력하여 한국예술의 지향할 목표

에 대한 원측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1)

한국양악계가 17세기 전반기부터 서양음악문화와 실제를 수용한 이래 300

년 이상 한국의 사회적 접촉이 이루어졌지만, 1860년 근대직후의 100년간의

성격은 서양제국주의의 ‘힘’의 논리로 작용되고 있었다.1) 한국의 역사적인

민족현실과 괴리된 채 전통음악과 양악이 이분법으로 분리되어 양악우위의

음악사회가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윤이상이 음악의 정체성으로 내세운

역사적·미적 과제의 ‘한국음악수립’은 양자간의 ‘대화’였다. 양악계가 ‘한국

민족으로서 자각’하면서 수천년동안의 전통음악과 대화하고, 전통음악계는

음악과학적인 양악과 대화하여 저마다 전환기를 이룰 수 있는 ‘대화’로 수

정의 역사의식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 자기반성의

대화없는, 특히 사회적인 분위기와 서구중심적 견해의 역사철학이 양악의

94) 윤이상, 「작곡계, 발흥기에 도달하였다」, 앞의 책, 12쪽. 95) 윤이상, 「악계구상의 제문제」, 앞의 책, 334쪽. 96) 윤이상, 「성악가에게 드리는 고언」, 앞의 책, 48쪽. 97) 윤이상, 「작곡계, 발흥기에 도달하였다」, 앞의 책, 12쪽. 98) 윤이상, 『한국근대음악사』 Ⅰ(서울:한길사,1995), 347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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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61

우위론적 힘을 부각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음악은 ‘시대의 골동취미에

잠긴 유물’이나 ‘야비한 문화’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양악의 악단 뿐만 아니

라 ‘사계예술의 공통의 숙명’으로 풀어야할 과제이며, 또 ‘작자와 예술가들

이 협력하여 한국예술의 지향할 목표에 대한 원칙적’인 대화로 한국음악수

립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대화없이는 한국음악수립은 처음부터 허구라

고 윤이상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각된 전통음악, 그 ‘국악’을 무조건 동의하지 않았다. 국악계를

대우하는 사회적 환경도 문제이지만, 그 음악이 ‘시대의 진보에 낙후된 음

악양식’이므로 ‘이 모양대로 다시 이것을 후전(後傳)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윤이상이 보고 있다. 윤이상은 대안으로 전통음악을 ‘시스템’을 발전

시키려고 하였다. 윤이상은 정부나 사회의 발전책과 더불어 서양음악의 방

법을 체득한 이론가를 중심으로 악곡을 전부 채집하고, 새로운 기보법 창안

과 악기개량은 물론 연주자태의 현대적 개조, 또 전통의 특수악기의 성능

높히기와 화성과 악식 기타 작곡이론체계를 세워 신작품의 산출이 통합적이

고 구조적인 ‘국악시스템’ 발전이 전제될 때 ‘한국음악수립의 좋은 계시와

발전’이 있을 것으로 전망한 것이 그것이다.1)

윤이상은 비록 한국음악수립의 전제로서 전통음악이 부각되었지만, 양악

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 않했다. 왜냐하면, 양악은 이미 사회적 수용이 되

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음악수립을 세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국제

사회와 끊임없이 대화해온 것이 우리의 문화사이었기 때문이다.1)

그러나, 윤이상의 입장은 ‘양악계에서 접근한 한국음악수립’이란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윤이상이 한국의 전통음악을 수천년동안 내려오면서 ‘시 99) 윤이상, 「악계구상의 제문제」, 앞의 책, 337쪽. 100) 이 문맥은 윤이상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한반도가 동아시아와 국제

적인 관계를 맺어오면서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선진 외래문화를 비판적으로 섭취하여 새

로운 민족문화로 발전’하자는 정체적 문화론은 해방공간에서 민족음악으로 발전시켜 왔고, 그 영향권에 윤이상이 있었으며, 또 윤이상의 여러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

맥은 가능하다. 곧, 윤이상이 「악계구상의 제문제」에서 ‘세계에 통하는 문제’ 진술이 이것

을 반증하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방송프로·레코드·악보·악서의 수용과 각 부문에 외국인 전문가 한사람씩 초빙하고, 또 유학생 파유 등 세계기구에 가입하여 세계와 간격을 좁히는 과제들이 세계에 통하는 과제로 보고 있다. 이 밖에 윤이상은 한국음악수립으로 좋은 후진

들에게 교육방법 지원과 발표기회를 제공하는 견해를 동시에 개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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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음악과 민족 제17호

대의 진보에 낙후된 음악양식’으로 보거나 ‘그 모양 그대로 까닥않기로 5백

년이나 천년’ 이상 된 음악이어서 이것을 오늘날에 그대로 전하는 것이 복

고적이라고 지적한 음악역사관은 당대까지 한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서양중심적 견해에서 비롯한 발전론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기 때

문이다.1) 한국음악의 정체성을 가져다주는 역사적 기반, 곧 민족의 전통이

근대 제국주의의 힘의 논리에 밀려 ‘근대화의 걸림돌’로 여기고 있었고, 또

일제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왜곡되었으며, 세계냉전체제에 의하여 그 문화가

역사적 해체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한국음악의 수립은 민족전통문화가 완벽

하게 회복하는 길이 한국음악수립의 올곧은 역사적·미적 과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음악을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정체적(停滯的)인 음악

으로 인식한 윤이상의 역사철학적 인식은 완벽한 서구의 발전론적 역사관에

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한계성이 노출되는 것은 그 자신이 전통음악

권 밖에서 접근한 ‘반성된 양악인’인데다 전통음악권 안으로 들어와 충실하

게 대화하지 않은데서 야기된 역사관이었다.1)

한국에서 윤이상은 한국음악수립을 역사적·미적 중심 과제로 삼고 이론과

실제적 접근을 일관되게 모색했다는 점에서 돋보이지만, 그의 역사관은 ‘서

구중심적 견해에 의한 발전론적 역사관’이어서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전통

음악권 안으로 들어와 충실하게 대화할 수 있었던 시기는 역설적이지만 한

국을 떠나 유럽에 있을 때였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저는 제 고국의 풍부한 음악전통을 여흥삼아 듣고 지내온 편이었습니다. 저는 유럽에 와서야 비로소 한국의 전통음악 속에 숨겨진 보배를 깨닫게 되었습니다.1)

101)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하여 여러 글에서 집중적으로 밝힌 바 있다. 노동은, 「한국음악 제3전

환기 선언」, 『한국민족음악현단계』(서울:세광음악출판사,1989), 25쪽. 노동은, 「참과 거짓

의 노래사」 Ⅰ, 『겨레의 노래』 1(서울:한겨레신문사,1990), 293-296쪽. 노동은, 「음악은 ‘화성’이 절대적인가? 아닌가?」, 『객석』 7월호, 통권137호(서울:예음문화재단,1995), 132-135쪽. 노동은, 「전통음악의 완벽한 회복과 창조적 계승」, 『현대사상연구』제10집(대전:목원대학교 현대사상연구소, 1997), 20-25쪽.

102) 이 분야의 글로서 노동은, 「전통음악의 완벽한 회복과 창조적 계승」, 위의 책을 참고하라. 103) 윤이상,「드뷔시와 나」, 『윤이상의 음악세계』, 앞의 책, 67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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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63

한국에서 윤이상은 전통을 진지하게 대화한 것이 아니라 ‘여흥거리’였고,

유럽에서 비로소 ‘전통음악 속에 숨겨진 보배’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전

통과 대화가 바로 과거회귀를 뜻하는 전통주의가 아니다. 전통과 대화없이

는, 전통의 미적·역사적 이해없이는 창조적 현대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음악 정체성 찾기에 촛점이 모아진다면 완벽한 전통회복과 창조적 계승

을 위해서도 ‘더욱 전통적’이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윤이상은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세계와 대화한 전통 중

에서 특히 자신의 음악철학적 배경을 노장(老莊)철학에 두고 있다. 유럽에서

그는 작품과 그 이론적 근거 그리고 지향하고 있는 세계관을 거의 노장철학

에 두고 이를 밝혀 나갔다.

9. 윤이상과 노장철학

유럽의 윤이상 음악과 삶의 중심으로 작용한 노장(老莊)철학도 한국에서

는 그의 ‘학습거리’였지 음악표현이나 음악철학관으로 직간접으로 작용되지

않했다. 그가 유럽에서 음향기법의 배경을 서양에 두지 않고 동아시아적 음

향관에 두었을 때, 이를 설명하면서 거론된 내용들, 곧 ‘음 하나하나의 중요

성이나 이러한 개별음에서 모든 것이 출발한다거나, 선적이면서 유동하는

진행’ 등의 내용은 노장철학 또는 도교사상의 전통에서 발전시킨 창의적 음

악관이었다.1) 오히려, 윤이상은 한국에서 ‘학습거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유럽에서 새롭게 그 전통을 발견하고 대화하므로서 창의적인 창작가가 될

수 있었다.

A. 아마 저의 ‘음향작곡물’들은 이 시기에 씌어진 리게티와 펜데레츠키의 작품과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든 작품들은 그들의 것

과는 다른데, 그것은 제 음향기법이 동아시아적 음향관에 바탕을 두고 있기

104) 윤이상, 「정중동(靜中動):나의 음악예술의 바탕」, 『윤이상의 음악세계』, 위의 책, 51쪽에

서 그가 “도교사상을 저버린 적이 없다”라거나 “도교적 원칙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저의 곡들은 도(道)의 표현들”이라고 하면서 여러 음악론을 펼치는 바, 노장철학은 유럽에서 생

활한 윤이상의 중심적 사상으로 발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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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음악과 민족 제17호

때문입니다. 동아시아적 음향관에서는 음 하나하나가 중요시되며, 바로 이 개

별음에서 모든 것이 출발합니다. 선적이면서도 유동하는 진행 속에서 개별음

은 파상적으로 미끌어지는 음, 글리산도, 트릴, 음색과 음량의 농담효과 등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입니다.1)(밑줄은 필자)

B. 그 경우에 나는 늘 내가 구사하는 음 자체가 서양의 음과는 다르다고 말하지

요. 나는 불쑥 나타났다가 불쑥 끝나버리는 음은 쓰지 않아요. 나의 음은 반드

시 어떤 장식이랄까 준비음을 획득해서 정착하고, 그리고 그 음을 살리기 위

해서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런 운동을 하기 시작한 다음 이번에는 거기에 커

다란 생명력이 생겨나는 거지요. 그런 다음 또 그 다음의 음이 정착되는 일이 되풀이되지요··· 나는 신자는 아닙니다만 도교철학을 아주 존중합니다. 그 철

학으로 말하자면, 이 우주는 음으로 충만해 있어요···이 우주의 음은 무한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 중 아주 얼마 안되는 한 끝만을 정리한 것이 내 작품입

니다···‘하우프트톤’은 둘이 있는 경우도 많아요. 둘이 있으면 그것은 음양(陰陽)관계를 갖지요. 예컨대 동(動)과 정(靜)의 관계이기도 합니다.1 )(밑줄은 필

자)

위 인용문들은 유럽에서 윤이상이 자신의 음악과 동아시아 철학과 관계를

설명하는 주요 내용이다. 다양한 동아시아 철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이 내

용들은 특히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철학에서 구체화된 바 있다.

노자는 “도(道)는 一을 낳고, 一은 二를 낳고, 二는 三을 낳고, 三은 만물

을 낳으니, 만물은 음(陰)을 짊어지며 양(陽)을 감싸안고 떵 빈 기(氣)로서

화평함을 이룬다”고 하였다.1 ) 이것은 천지만물의 존재를 분석하는 형식적

개념으로 道가 하나의 존재[有]를 낳고, 그 하나는 이미 道를 전제하면서 하

나의 존재[有]가 있으니 그 수가 둘이며, 하나가 있고 둘이 있으니 그 수가

셋이 되었다. 일체의 사물을 의미하는 만물은 그 만물을 존재케 하는 道로

말미암아 생성된 것이므로, 道 자체는 이름을 붙일 수 없으므로 무(無)라고

한다. 그러고보면, 有는 無에서 생성된다.

윤이상이 말한 ‘동아시아적 음향관’이란 이러한 노자의 음악화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의 개별음’은 ‘파상적으로 미끌어지는 음, 글리산도, 트릴, 음색

과 음량의 농담(濃淡) 효과’ 등의 선적(線的)으로 흐르면서 ‘생생하게 살아

105) 윤이상, 「드뷔시와 나」, 위의 책, 67쪽. 106) 니시무라 아키라(西村 朗), 「무한한 우주의 한 끝에서」, 위의 책, 153-157쪽에서 재인용. 107)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老子』, 42章 「道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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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65

움직임’[生動]으로 생명을 얻어간다. 즉, 하나의 개별음이 둘과 셋 등의 여러

음들을 차례로 파생시키면서도 하나의 큰 생명으로 움직이는 윤이상의 어법

은 노자의 음악화이다. 또, 하나의 개별음이 주요음(Hauptton)으로 생명을 얻

기 위해서도 그 음은 어떤 장식음이나 준비음을 역동적으로 화합시켜 나갔

다. 이것들이 윤이상의 음악어법의 특징인 ‘음통일체’(Ton-Einheit)이며, 음통

일체가 또하나의 음통일체를 파생시켜 동시적인 선적흐름으로 진행하는 어

법이 필자가 지적하는 바의 ‘음향통일체’(Klang-Einheit)이다. 하나는 둘을 낳

고, 둘은 셋을 낳는 것이 모두 道속에 포괄되기 있기 때문에 음통일체가 또

하나 뿐만 아니라 또다른 선적 통일체를 함께 포괄하여 흐를 수 있으니, 노

자의 음악화가 아닐 수 없다.

“道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등을 달리 말한다면, 道에서 하나

의 氣가 나오고, 그 하나의 기(氣)는 다시 둘로 나누어져 음(陰)과 양(陽)이

생기고, 그 음양(陰陽) 둘이 서로 조화함으로써 세번째의 화합체가 생겨, 비

로소 만물이 나오게 된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하나의 음을 존재케 하는 것

이 道이고, 道에서 하나의 기(氣)가 둘인 음양(陰陽)을 낳았으니, 윤이상이

말하는 “둘이 있으면 그것은 음양(陰陽)관계”를 갖는 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道는 음양(陰陽)이라는 양극성(兩極性, polarity)을 낳는 바, 천지

간의 자연현상들에 대한 1차적 상관관계와 1차적 상관관계에서 추측(推測)

한 2차적 상관관계가 바로 동(動)과 정(靜)이었기 때문에 “예컨대 동과 정의

관계”라고 윤이상이 말한 것이다.1)

노자는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등의 다섯 중심음 체계로 만들어지는 음

악이 사람의 귀를 귀먹게 한다며 ‘인위적인 음악’에 부정적이었다.1) 노자는

“사람은 땅을 본받았고, 땅은 하늘을 본받았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았고, 도

는 자연을 본받았다”1)처럼 모두 본받아 되돌아 옴이 道인데, 그 道가 스스

로 그러함인 자연(自然)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오음(五音)을 전제로 한 음악

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음악이기 때문에 그 음악은 ‘자연을 따르지 않

108) 노동은, 「음악기학」(音樂氣學), 『민족음악의 이해』 3(서울:민족음악연구회,1994), 45-103쪽

중 62-63쪽을 참고하라. 109) 五音令人耳聾.『老子』, 12章 「檢欲」. 110)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老子』, 25章 「象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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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음악과 민족 제17호

는 음악’이라고 노자는 비판한 다. 노자가 추구한 음악은 ‘자연을 따른 대

음’(大音)이었다.

A. 아무리 보려 해도 보이지 않아서 이(夷)라 하고,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아서 희(希)라하며,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어서 미(微)라 하니, 이 세 가지(夷·希·微)는 분명하게 가려낼 수 없다. 그러므로 (道는) 뒤섞인 하나이

다.1)(밑줄과 괄호는 필자)

B. 가장 큰 방형은 구석이 없고, 가장 큰 그릇은 만들 수가 없고, 가장 큰 음[大音]은 들리지 않는 소리[希聲]이고, 가장 큰 형상은 형태가 없다. 道는 은미하

고 이름이 없다. 오직 道만이 잘 베풀어서 만물이 이루어진다.1)(밑줄은 필자)

노자는 道야말로 이름이 없고 일체의 만물을 포괄하고 있는 근원이니 A

에서 “아무리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는 희(希)”라고 하였다. 물론 道는 이(夷)

와 희(希)와 미(微)를 하나로 포괄해야함을 전제한다. 여기에서 희(希)는 무

(無)라고 할 수 있다. B에서 노자는 道와 같은 音, 곧 ‘가장 큰 음’인 ‘대

음’(大音)은 ‘들리지 않는 소리’, 희성(希聲)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대음(大

音)의 ‘대’(大)는 ‘태초의 無’이자 ‘無에 두고 道와 하나됨’을 뜻한다. 대음

(大音)은 道의 음악이 아닐 수 없다. 노자는 최고의 음악으로서 대음희성(大

音希聲)을 바랬다. 대음희성(大音希聲)의 현대적 해석은 창작이라는 인위성

을 초월한 가장 자연스러운 음악을 뜻한다. 道 그 자체를 드러낸 대음희성

이야말로 우주에 충만하게 있는 자연음악이라고 한다면, 윤이상은 자신의

작품을 두고 “우주 중의 아주 얼마 안되는 한 끝만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

다고 말한 것은 이를 암시하고 있는 말이다.

윤이상의 세계관은 노자의 음악철학을 관통하면서 발전시킨 장자(莊子)도

있다. 장자는 인위적인 음악 만듬은 인간의 본성을 잃게하는 행위하고 다음

과 같이 비판하는데서 노자를 따른다.

백년쯤 묵은 좋은 나무를 발견하여 이를 잘라내어 세공(細工)하여 제례(祭禮)

111)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老子』,

14章 「贊玄」. 112)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老子』, 41章 「同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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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67

에 쓸 술통을 만들고, 거기다 청·황(靑黃)의 채색을 넣어 근사하게 만든다. 그리

고, 나머지 나무조각은 도랑에 버려진다. 그러나, 아름답게 세공된 술통과 도랑에 버려진 나무조각을 비교해보면, 하나는 아름다운 물(物)이고 다른 하나는 추한 물(物)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어느 것도 나무의 본성을 잃었다는 데 있어서는 같다···일반적으로 인간이 그 본성을 잃는 데에는 다섯 가지 경우가 있

다. 그 하나는 청·적·황·백·흑(靑赤黃白黑)의 다섯 가지 빛깔이 만들어 내는 색채

가 눈의 기능을 어지럽혀 그 본래의 참신한 감각을 잃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의 다섯 소리가 만들어내는 묘한 음악이 귀

의 기능을 어지럽혀, 그 본래의 예민한 감각을 잃게 하는 것이다.···이 다섯 가지

의 것은 모두 인간의 생명을 손상시키는 것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 군자라고 칭송받는 자들은 취사(取捨)의 사려나 음악·색채 등의 향락으로 그 안

[內]인 정신을 가두고, 피변(皮弁)·휼관(鷸冠)·홀(笏)·긴 띠 등의 예장(禮裝)으로 그 밖[外]인 용모를 속박하여, 안으로는 말뚝을 줄로 지어 박아놓고, 밖으로는 줄을 칭칭 몸을 묶어놓고도 자신은 그 본성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1)(밑줄은 필자)

인위적인 만듬이야말로 본성을 잃게하는 것으로, 인위적인 음악의 만듬은

본성을 잃어버리는 다섯가지 요인중의 하나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미 노자

는 인위적으로 만든 5음이 귀를 멀게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장자가 생각하

는 지고(至高)의 음악은 道를 체득하고 덕(德)을 세워 무심(無心)과 무위(無

爲)로 접근하는 음악이다. 노자보다 장자는 음악의 본질과 만듬이 세 단계

로 구체화 시킨다.

대저 道는 물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못[淵]처럼 정지하고 있으며 깨끗한 물처럼 맑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쇠[金]나 돌[石]로 만들어진 악기도 그 道에 의하지 않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 인간은 쇠나 돌로 만든 악기를 두드려 보지않고는 소리가 나는 것을 알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가 만물을 안정시키고 있는지도 범인(凡人)으로는 그것이 드러나 보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대저 道를 체득하여 왕덕(王德)을 갖춘 사람은 허심(虛心)으로서 物에 응해 자

신이 세세하게 업무에 통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왕덕을 갖춘 사람은 아무

것도 구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物을 보고 아무런 소리도 없는 침묵 속에서

도 소리를 듣는다. 더우기, 그런 어둠 속에서 홀로 밝은 道을 보고 그런 침묵 속

에서 홀로 만물의 화합을 듣는 것이다···그래서 그 사람이 만물을 접하는 데에는

113) 百年之木, 破爲犧樽, 靑黃而文之. 其斷在講中. 比犧樽於溝中之斷, 則美·惡有閒矣, 其於失性一

也···且夫失性有五. 一曰, 五色亂目, 使目不明. 二曰, 五聲亂耳, 使耳不聰···此五者, 皆生之害

也···且夫趣舍聲色以紫其內, 皮弁鷸冠, 搢笏紳脩以約其外, 內支盈於紫柵, 外重木墨繳, 晥晥然在木

墨繳之中, 而自以爲得. 『莊子』, 「天地」 第15 難失性論; 번역은 박일봉 역, 『莊子』 외편(서울:육문사,1990), 166-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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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음악과 민족 제17호

완전히 무심(無心)·무위(無爲)하며, 나아가 만물의 어떠한 요구도 만족시켜 주며, 적시즉응(適時卽應)하여 만물의 안정을 도모시켜준다. 큰 일, 작은 일, 긴 일, 짧

은 일, 어떤 일에도 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1)(밑줄은 필자)

이 글은 비록 모든 사람이나 사물 등 만물의 생존을 완성시키는 군주를

가리키고 있지만, 음악을 창조하는 창작가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곧, 금(金)과

석(石) 등의 악기와 그 음악은 道에 의하지 않거나 道를 얻지 않고서는 이

룩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道를 얻어 덕(德)을 갖추면‘아무런 소리도 없

는 침묵 속에서도 소리를 완성하는 창작가’가 된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 속

에서 음악을 창조하는 음악인은 먼저 ‘완전히 무심(無心)과 무위(無爲)’에 있

을 때 비로소 道의 음악에 도달하여 이룰 수 있음을 장자는 말하고 있다.

장자는 여기에서 최고의 음악, 그 道의 음악 경계에 도달하는 단계와 방법

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점에서 그는 노자보다 더 구체적으로 음악론을 발

전시켰다. 이것이 유명한 장자의 ‘세가지 음악론’이랄 수 있는 ‘삼뢰론’(三籟

論)이다.

남곽자기(南郭子綦)가 팔꿈치를 괴는 낮은 탁자에 의지하여 앉아 있다가, 하늘

을 우러러 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멍청하여, 마치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안성자유(顔成子游)가 자기(子綦)의 앞에 서서 모시고 있다가 말

했다. “어찌 되신 것입니까? 몸은 말라 죽은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지

만, 마음을 불 꺼진 재처럼 정지시킬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어 앉은 선

생님의 모습은, 조금 전에 책상에 기대어[이야기를 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

닙니다.” 자기(子綦)가 말했다. “언(偃)아, 좋은 말이다. 너의 물음은. 지금 나는 ‘나를 잊었는데’[喪我], 너는 그것을 알고 있느냐? 너는 [내가 토해 내는 숨으로 소리내는] 사람들의 소리[人籟]를 들어 알지만, 아직 땅이 연주하는 지뢰(地籟)는 듣지 못했구나. 아니, 땅의 소리는 들었을지 모르지만, 아직 하늘의 소리(天籟)는 듣지 못했구 나.[나는 나를 잊고 바로 그 천뢰를 듣고 있었다.]” 자유(子游)가 말했다. “감히 땅의 소리와 하늘의 소리를 들어 아는 방법에 관해 여쭈어 보

114) 夫子曰, “夫道, 淵乎其居也, 氵翏乎其淸也. 金·石不得, 無以鳴. 故金·石有聲, 不考不鳴. 萬物郭能

定之. 夫王德之人, 素逝而恥通於事. 立之本原, 而知通於神. 故其德廣, 其心之出, 有物採之. 故形非道不生, 生非德不明. 存形窮生, 立德明道, 非王德者邪. 蕩蕩乎, 忽然出, 勃然動, 而萬

物從之乎. 此謂王德之人. 視乎冥冥, 聽乎無聲. 冥冥之中, 獨見曉焉, 無聲之中, 獨聞和焉. 故

深之又神, 而能精焉. 故其與萬物接也, 至無而供其求, 時騁而要其宿. 大小長短脩遠(小大·脩短, 各有其具).” 『莊子』, 「天地」第12, ‘王德說’. 번역은 『莊子』, 박일봉역저, 앞의 책, 118-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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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69

겠습니다.” 자기가 말했다.“대저 대지가 갑자기 토해내는 큰 숨을 바람이라 한다. 그것은 늘 일어나지는 않지만, 일단 일어나면 곧 땅 위에 있는 모든 구멍이 성내

어 울부짖는다. 너도 그 요란한 울부짖음을 들었을 것이다. 산과 숲의 골짜기와, 아름드리 큰 나무들의 구멍--코를 닮은 것, 입을 닮은 것, 귀를 닮은 것, 두공(斗拱) 같은 것, 그릇을 닮은 것, 절구를 닮은 것, 깊은 웅덩이를 닮은 것, 얕은 웅덩

이를 닮은 것 등--이 물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 우는 살처럼 날카롭고 높은 소

리, 꾸짖는 소리, 들이마시는 소리, 외치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아름다운 소리, 새가 지저귀듯 사랑스런 소리를 낸다. 앞에 있는 것이 ‘우우’하고 외치면, 뒤에 있는 것이 ‘우우’하고 화답한다. 시원한 바람이 불면 작게 화답하고, 거친 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한다. 사나운 바람이 지나가면 여러 구멍들은 잠잠해진다. 너도, 모진 바람이 지난 뒤, 부드러운 바람이 나뭇가지를 가볍게 흔들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자유가 말했다. “땅의 소리는 모든 구멍이 내는 소리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리가 관악기의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인 것과 같습니다. 감히 하늘의 소리(天籟)에 관해 여쭈어 보겠습니다.” 자기가 대답했다. “천뢰의 경우에 있어서도, 소리를 내는 것은 어느 하나도 같지 않지만, 그것들로 하여금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있다. 너는, 소리는 소리를 내는 것들이 스스로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실로 그것들로 하여금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그것은, 소리는 내는 바로 그것이 아니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1)(밑줄은 필자)

통상 ‘천뢰 우화’로 알려진 이 글에서 등장하는 남곽자기(南郭子綦)는 기

원전 518년에서 491년까지 재위한 초(楚)나라 소왕(昭王)의 서제(庶弟)로 道

를 체득한 사람으로 알려졌고, 道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으로 설정된 안성자

유(顔成子游)는 자기의 제자로서 성은 안(顔), 이름이 언(偃), 자가 유(游) 그

리고 시(諡)가 성(成)으로 알려졌다.1) 두 사람의 대화에서 자기는 인뢰(人籟)

·지뢰(地籟)·천뢰(天籟) 등 음악의 경계를 세 단계로 구별하여 최고의 음악경

계인 천뢰에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인뢰는 인간의 여러 가지 언

115) 南郭子綦隱 而坐. 仰天而噓. 嗒焉似喪其耦. 顔成子游立侍乎前. 曰, “何居乎. 形固可使如穚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今之隱几者, 非昔之隱几者也.” 子綦曰, “偃, 不亦善乎, 而問之也. 今者吾

喪我. 汝知之乎. 女聞人籟, 而未聞地籟, 而未聞天籟夫.” 子游曰, “敢問其方.” 子綦曰, “夫大塊

噫氣, 其名爲風. 是唯無作, 作則萬竅怒呺, 而獨不聞之翏翏乎. 山林之畏佳, 大木百圍之竅穴, 似鼻, 似口, 似耳, 似枅, 似圈, 似臼, 似洼者, 似汚者, 激者, 謞者, 叱者, 吸者, 叫者, 譹者, 宎者, 咬者. 前者唱于, 而隨者唱喁. 冷風則小和, 飄風則大和. 厲風濟, 則衆竅爲虛. 而獨不見之

調調之刁刁乎.” 子游曰, “地籟則衆竅是已. 人籟則比竹是已. 敢問天籟.” 子綦曰,“夫吹 萬不同, 而使其自己也. 咸其自取, 怒者其誰邪.” 『莊子』, 「齊物論」 第二. 번역은 『莊子』, 박일봉 편저, 앞의 책, 67-69쪽.

116) 『莊子』 -內篇-朴一峰 역저, 위의 책, 65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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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음악과 민족 제17호

론을 포함한 소리를 가리킨다. 뢰(籟)는 본래 공기의 진동으로 소리내는 공

기울림악기(Aerophon)이다. 길이가 서로 다른 16개의 관으로 만들어진 소

(簫)의 또다른 이름이므로 인뢰는 인간의 음악을 말한다. 지뢰는 땅의 바람

소리 등 대지가 내는 음악을 가리킨다. 천뢰는 道가 작용한 하늘의 소리이

자 하늘음악이다.

장자의 삼뢰(三籟論)은 마치 중세 서양에서 보에시우스(Boethius;†약524)가

음악을 세 가지로 구분한 것과 비슷해 보인다. 보에시우스는 우주의 음악으

로서 무지카 문다나(musica mundana), 인간의 음악으로서 무지카 후마나

(musica humana), 도구음악으로서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musica

instrumentalis)로 설정한 바 있지만, 장자와는 다르다. 무지카 후마나와 무지

카 인스트루멘탈리스가 장자에겐 인뢰에 해당되고, 보에시우스의 구분 중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가 실천적 음악(musica practica)으로, 다른 두 가지

가 이론적 음악(musica theorica)으로 후에 유럽에서 발전하는 비하여 노장에

서는 그러한 전개가 없다. 또, 무지카 문다나가 4계절을 포함한 우주의 하모

니인데 비하여 천뢰는 무지카 문다나의 구체성을 초극한 음악이기 때문에

비교가 다른 것이다.

장자에서 세 가지의 분별은 최고의 음악, 최고의 경계로서 ‘나를 잊는 상

태’에 도달하는 방법을 세 단계로 분별한 데 있다. ‘나를 잊는 상태’로 번역

되는 본문 ‘상아’(喪我)에서 ‘상’은 ‘망’(忘)을 뜻한다. 둘 다 ‘잊었다’의 뜻을

가졌다. 상아(喪我)란 망아(忘我)이다. 이것은 사람이 인뢰에 집착하면 지뢰

를 놓치고, 자연경계의 지뢰를 분별하면 하늘경계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

에 끊임없이 하늘경계에 의거하여 음악을 잊어버릴 때 비로소 상아-망아의

음악인 천뢰의 음악에 이른다. ‘나를 잊는 경계’야말로 인뢰와 지뢰의 분별

력을 지녔으나 그것을 잊은 망악(忘樂)이자 무악(無樂)의 경계에 이른다. 망

악이자 무악은 음악이 있기 이전의 원시적 상태의 음악이 아니라, 인뢰와

지뢰의 음악을 깨달음으로 초극하여 최고의 하늘경계에 도달한 음악이다.

곧, 장자는 망아(忘我)에 의하여 道를 체득하는 음악을 최고의 음악을 추구

하였다. 그런데, 장자는 이러한 최고의 음악을 ‘함지의 음악’(咸池之樂)이란

용어로 명시하면서, 그 음악의 내용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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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71

북문성(北門成)이 황제(皇帝)에게 물었다. “황제께서 함지(咸池)의 악(樂)을 동정

(洞庭)의 들에서 성대하게 거행하셨을 때, 저는 처음에는 두려움[懼]을 느꼈고, 좀 더 듣고 있자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되었고[怠], 마지막에는 어떻게 해

야 좋을지 미혹[惑]되어 버렸습니다. 끝없이 넓은 곳에 있는 듯 하여, 아무런 말

도 할 수 없었고 제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대답했다. “자네라면 필시 그렇게 되었을 테지. 나는 저 함지악을 처음

에는 인사(人事)로서 연출하고, 다음에는 천상(天象)으로서 일으키고, 예의에 맞

게 진행시켜, 진실의 맑음으로서 완성되도록 했던 것이다. 대저 절묘한 음악이란 우선 인간의 영위에 응하도록한 다음 하늘의 도리에 좇도록 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상에 오덕(五德)을 전개하고 이에 자연의 이법(理法)이 응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사계(四季)의 추이를 순조롭게 하고 만물을 막힘없이 화합시키는 것이다. 내가 사계의 갈마듦을 전개시키면, 인간과 갖가지 물(物)이 생동한다. 그것

은 혹은 성대하고 혹은 쇠망한 영위가 되어 그것들을 혹은 온화한 문교(文敎)로서 혹은 강건한 무력에 의해 다스리기도 하여, 그것들이 이루어내는 맑은 가락과 탁한 가락은 결국 음양(陰陽)이 서로 조화(調和)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내가 함

지악의 음악을 널리 흐르게 하면 흙 속에 숨었던 벌레도 기어나온다. 그러면 나

는 우뢰를 울려 만물의 활동을 촉진시킨다. 그러나 인간과 갖가지 물(物)로서는 지금부터 그 활동의 끝이 어떻게 될지도 그 활동이 어떻게 하여 시작된 것인지

도 알 수 없다. 다만, 죽고 태어나며 넘어지고 일어서는 등 끊임없이 변화하여 갈 뿐으로 무엇을 일정한 근거로 해야 좋을 것인지는 움직여 변하기 때문에 하

나로서 의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변화속에 있던 자네는 그래서 두려워졌

던 것[懼]이다. 나는 이어서 음양(陰陽)의 조화를 연주하고 그것을 日·月의 밝음으로 눈부시게 했다. 그 음악의 소리는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며 유화하기도 하고 강건하기도 하며 갖가지 변화가 있으면서 통일이 있고 더우기 평범한 데에 머물러 있지 않

는다. 깊은 골짜기 속에도 가득차고, 깊은 동굴 속에도 가득차며, 틈을 메워 그 영묘한 작용을 지켜 통하게 하면서 갖가지 物로 하여금 物의 한없음을 나타나게 한다. 그 음악의 소리는 명확하여 이를 ‘고명’(高明)이라 한다. 그러므로 귀신은 자신이 있어야할 유계(幽界)에 머물러 잘못하여 재난을 내리는 일도 없고, 아 日

月과 별은 궤도를 지켜 계절의 추이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다. 나는 이처럼 음악

을 유한한 세계에 전개하면서도 무한하게 진행시키고 있다. 그래서 자네는 이 음악에 관해 생각하려해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고, 이것을 멀리서 보아 무엇인지를 확인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으며, 쫓아가 잡으려해도 따를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자네는 기운없이 어디를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에서 낡은 책상에 의지하여 신음소리를 냈던 것이다. 자네의 눈은 그것을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고, 자네의 힘은 그것을 좇고자하나 힘이 부족하네. 그것을 눈과 힘으로 붙잡으려 하는 것은 나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이네. 인간의 신체는 공허하게 되면, 나긋나긋[怠]하게 힘이 없게 되는데, 자네는 그렇게 힘이 없게 되었던 것으로 아

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울적해진 것이었네. 나는 마음을 울적하게 하지 않는 음악을 연주하고, 이것을 자연이 이루어 가는

대로 조화시켰다. 그래서 이에 만물은 무리를 이루어 서로 경쟁하거나 무리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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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음악과 민족 제17호

루어 생겨나거나하여 각각의 생을 완수하고 크게 즐거워했는데 그것은 形이 있

는 음조로서는 울리지 않고, 또 그 즐거움은 만물에 널리 미쳤지만 하나의 物에

만 끌리는 일 없이, 요컨대 그 악조는 오심(奧深)한 어둠 속에서 울리고 있어 음

성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향으로도 움직이지만, 사실은 인간따위

에게 알려지지않은 심오함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나 만물은 이것을 놓고 죽었느니 살았느니, 열매이니 꽃이니 하며 소란스럽게 떠들지만 그것들은 지

나가 버리고 흩어져버리는 것으로 언제까지나 같은 가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

다. 세속의 인간으로서는 이러한 변화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성인에게 물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참된 성인은 이 음악의 진실에 통하고 있어 그 자연이 이

루어 가는 것을 달성한다. 그래서 굳이 마음을 널리 쓰지 않더라도 다섯 개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작용하여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마음 속으로 기뻐한다. 이것

을 하늘의 즐거움[天樂]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염씨(有焱氏)가 이 음악

을 칭찬하는 노래를 지어 ‘들으려 해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고, 보려해도 그 모

습이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천지에 가득차고, 상하사방을 남김없이 감싸고 있

네’하고 한 것이다. 그래서 자네가 이것을 들으려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네. 자네는 그래서 미혹(惑)된 것이었고. 음악이라는 것은 두려움[懼]으로부터 시작한다.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되기에 마

음을 괴롭히게 된다. 나는 이에 뒤이어 마음이 나른해졌네[怠]. 마음이 나른해져

야만이 비로소 의력(意力)이 무너지게 된다. 나는 마침내는 미혹[惑]에 빠진 듯 했네. 미혹에 빠져야만이 현명한 마음이 사라지고 어리석게[愚] 된다. 어리석게 되어야만이 道를 깨달을 수가 있다. 道야말로 음악을 싣고 진행시켜 이것과 하나

가 되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1)(밑줄은 필자)

북문성(北門成)과 황제(皇帝)간 ‘함지악’(咸池樂)에 관한 문답으로 전개한

이 전문(全文)의 우화에서 함지악은 ‘두려움’[懼]→‘나른함’[怠]→‘미혹됨’[惑]

→‘어리석음’[愚]의 과정을 거친 道에 의한 음악이었다. 황제가 제정한 함지

악은 곧 해 떠오르는 동해 그 함지(咸池)를 가무악(歌舞樂) 형태로 표현한

악(樂)이다. 수평선과 조금 떠오른 해 사이에 어두운 공간이 전개된 그 동정

지야(洞庭之野)에서 장대하게 연주한 함지악을 두고 황제의 신하 북문성과

황천상제(皇天上帝)인 황제 사이의 대화가 위 내용이다. 위 내용은 북문성의

묻는 서론적 대목과 황제가 본론과 결론적으로 답하는 대목으로 크게 구성

되어 있다. 황제의 응답한 부분은 함지악의 기본구조 설명과 두려움으로 시

작하는 대목과 나른함을 거치는 대목, 그리고 미혹됨에 이르는 대목, 끝으로

117 ) 北門成問於皇帝曰, “帝張咸池之樂於洞庭之野, 吾始聞之懼, 復聞之怠, 卒聞之而惑, 蕩蕩默默,

乃不自得.” 이하 원문은 『莊子』 外篇, 박일봉역저, 위의 책,219-220쪽, 번역도 같은 책, 222-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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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73

어리석음에 이르러 비로소 道를 깨닫는 대목으로 되어 있다. 먼저 황제는

음악이 사람으로서 소재로 하고, 그 근본이 자연의 道인 천리(天理)로 자연

을 조화시키는 본질임을 답하고 있다. 두번 째에서 함지악이 모든 만물의

생사와 흥망의 끊임없는 변화가 전개되므로 그 앞일이 ‘두려운’ 것처럼, 음

양(陰陽)의 조화를 이룬 맑고 탁한[淸濁] 가락의 흐름도 그 끝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를 정도로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두려웠던 것이다. 세번 째에서 해와

달과 별과 북극성[日月星辰]의 우주에 음양의 조화로 함지악이 ‘갖가지 변화

속의 통일’로 움직이고 있어서 유한한 인간은 함지악의 道의 드러냄 앞에

무력해져 나른함에 빠지게 된다. 네번 째에서 ‘자연이 이루어 가는대로 조

화’시킨 그 음악이야말로 우주에 가득 차 있어 ‘하늘의 즐거움’[天樂]으로

미혹되고 있었다. 끝으로 미혹에 빠져야 현명한 마음이 사라지고 어리석게

되고 비로소 道를 깨달을 수 있는 경계에 이른다.

장자는 최고의 음악인 함지악이 창작의 구조와 드러냄의 세계는 물론 감

상태도 등 모든 음악원리가 ‘두려움’[懼]→‘나른함’[怠]→‘미혹됨’[惑]→‘어리

석음’[愚]의 과정을 거친 道에 의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음악에

관한 모든 지(知), 곧 있음[有]을 포기하여야 그 최고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지(知)를 포기한 결과가 무지(無知)라면, 이 무지는 물론 지

(知)를 거친 것이므로 기초적 무지가 아니다. 道의 경계에 이른 사람은 지

(知)가 없는 것도 아니고, 또 사물들을 분별하지 않는 것도 아니므로 앞서

그 상태를 ‘상아’(喪我)나 ‘망’(忘)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함지악은 음악으로

서 원리나 구조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나, 그것을 잊을 수 있는[忘], 초극하

는 음악이다. 이상의 노장(老莊) 음악론을 바탕으로 윤이상의 창작동기와 기법은 물론 세계관을 형성하여 여러 담론을 전개하고 있다. 발터 볼프강 슈파러

(Walter-Wolfgang Sparrer)가 지적하듯 윤이상의 작품이 ‘높고-낮고, 길고-짧고, 단단하고-부드럽고, 무겁고-가볍고, 불협화-협화’ 등 균형과 불균형간의 조화

로 조직되고 구성의 모든 차원에 적용이 바로 노장철학에서 말하는 음양(陰

陽)의 조화로 표현한 것이다.1) 윤이상은 궁극적으로 함지악과 같이 초극하

118) 윤이상·발터-볼프강 슈파러, 『윤이상-나의 길, 나의 이상, 나의 음악』, 정교철·양인적 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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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음악과 민족 제17호

여 道의 경계에 이르는 표현을 서양현대기법으로 하였다. ‘그 누구도 윤이상

만큼 확실하게 동서양의 음악세계를 종합해내지 못했다’라며 동양과 서양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평가들은 이를 두고 있다.1) 또, 역(易)의 道인 태극(太極)으로 우주의 커다란 근본을 삼은데서 음(陰)과 양(陽)의 기(氣)가 나오고

[一陰一陽謂道], 여기에서 사상(四象)과 팔괘(八卦) 등으로 뻐쳐 나오는 유기

체적 구조성을 전제로 독일의 음악학자 페터 레버스(Peter Revers)는 윤이상 작품의 기본범주로서 현대물리학의 홀론(Holon)체계로 주요음들을 분석할

수가 있게 되었다.1) 또한, 스위스의 음악학자 한스 외쉬(Hans Oesch)가 윤이

상의 「낙양」을 ‘道의 정신에서 나온 음악’으로 분석하고 해석한 것도 모두

이를 전제하고 있다.1)

나를 포함하여 천지(天地)에 이르기까지 만물(萬物)의 생명이 끊임없이 약

동하고 변화하고 있기에, 생명을 가진 인간이 대우주와 일체가 되려는 것이

중국철학의 일반적인 경향이다.1 ) 하늘[天]은 현대어의 ‘자연’이자, 道의 다

른 이름이다. 생명을 근본으로 삼는 사람이 하늘과 하나로 묶는 본질의 동

양철학을 윤이상은 한국에서 학습한 바 있다. 그러나, 윤이상은 한국에서 노장철학을 학습하였지만 그의 한국생활기의 작품에서는 적용되지 않했다. 그는 유학(儒學)의 ‘있음’(有, Being, 서양사상

과 다른)과 노장학(老莊學)의 ‘없음’(無,Nothing) 등을 학습하였지만 어느 경

우에도 한국에서 구체화하지 않했다. 윤이상이 노장철학을 서양현대기법으

로 표현하여 독자성을 획득하였다면, 이번에는 노장철학을 한국의 음악기법

으로 표현하는 것은 또다른 과제로 남는 문제이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한

국인들이 윤이상의 유럽 작품들을 어려워하는 대목이다. 그의 음악세계관은

울:도서출판 HICE,1994), 111쪽.

119) Frankfurte Rundschau 1995년 11월 6일자를 소개한 『한겨레신문』, 1995년 11월 9일자 15쪽. 120) Peter Revers, ‘Hauptton-Holon’, Der Komponist Isang Yun, Hanns-Werner Heister, Walter-Wolfgang

Sparrer(Hg.) (M chen: edition text+kritik GmbH,1987), S.81-94; 번역은 『윤이상의 음악세계』, 앞의 책, 294-315쪽.

121 ) Hans Oesch, ‘Musik aus dem Geiste des Tao’, Der Komponist Isang Yun, Hanns-Werner Heister, Walter-Wolfgang Sparrer(Hg.) (M chen: edition text+kritik GmbH,1987), S.11-27; 번역은 『윤이상

의 음악세계』, 앞의 책, 319-346쪽. 122) 김용옥, 『老子哲學 이것이다』 상(서울:도서출판통나무,1989), 73-83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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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75

언제나 같은 담론권에서 대화할 수 있지만, 짐짓 그의 작품자체를 낯설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인으로는 노장철학을 비롯하여 한국전통

음악을 다른 동양권과 유럽권에 음악을 통하여 화두로 삼게한 최대의 인물

임에 틀림없다.

10. 맺으면서

윤이상은 암울했던 일제하에 태어나 분단조국으로 이어지는 한국근현대사

의 역사현장에서 삶의 전반기에 마감하고 40세에 유럽권에서 후반기를 살아

가며 세계현대음악 중심권에 주목받는 음악가로 진출하였을지라도, 전반부

한국생활기에 민족문화유산을 창작정신과 소재의 근거로 삼음으로써 한국

과 서양을 잇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윤이상에게서 한국의 역사적인 민족

문화예술은 미적 창작의 계기도 되지만 정신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윤이상이 일제하에 항일운동으로 투옥된 사건은 스스로가 윤리

성을 획득하는 계기가 되고, 동시에 그 계기는 민족문화예술에 대한 천착적

대화를 이루어 한국생활기의 초기가곡을 비롯한 여러 창작품에 투영시킨 결

과이다. 이 평가들은 이 땅의 민족문화예술이 벌써 세계속의 생명적인 인간

화와 자주성으로 발전한 역사 속에서 대화한 결과이고, 그 점을 한국생활기

에 반영된 가곡에서 벌써 ‘앞당겨’ 세계화를 모색하고 있었음을 확인케 한

다. 이 땅에서 수천·수백년간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화를 모색하며 세계를

형성한 민족문화예술과 이제 우리들이 치열하게 대화를 전개할 때만이 세계

음악사와 새로운 균형과 질서를 가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 깨달음은

윤이상과 동시대에 민족음악을 실천한 음악인들이 우리 당대를 반성케 하는

힘의 깨달음이며, 우리들을 한국과 세계의 전 역사 앞에 소환시키주는 힘이

기도 하다.

그러나, 한반도의 민족문화예술이 그의 창작정신과 소재의 바탕이 되어

현대음악으로 반영이 되었을지라도 그것은 두가지 점에서 풀어나가야할 과

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창작의 아이디어와 재료선택이 서구의 현대어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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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음악과 민족 제17호

라는 점에서 우리가 나아갈 하나의 방향은 되었을지라도 그 전부는 아니라

는 점이다. 그의 어법은 음통일체와 음향통일체이어서 선적(線的)이고 리듬

적이지만 한반도 민족전통음악의 미적 특징인 ‘장단’이 아직 구체화하지 않

았다. 이것은 그가 음향과 음색기법을 중심으로한 서양현대음악 중심권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장단은 역사적으로 기화(氣化)의 음악화이다.1)

또하나는 윤이상의 미학적 세계관과 재료선택의 바탕이 된 것은 유학과

노장학 그리고 아악(또는 민요의 예술로서 아악화)이었지, 한국민족음악의

바탕인 민중들의 세계관과 민악(民樂)이 아직은 구체화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한국음악을 안팎으로 세계화 시키는 과제가 우리

들을 기다리고 있다.

분명, 윤이상의 출현은 우리가 지역적으로 한반도 만의 음악으로 위안받

는 시대가 지났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 예고는 한반도 음악사가 근대사를

통하여 ‘잘못된 계몽’으로 말미암아 서양음악학습만으로 역사화하였고, 일제

하에 우리들의 창조적 에너지인 민족문화유산이 ‘해체’되었으며, 현대사를

통하여 우리들의 음악적 삶의 조건이 분단으로 ‘억압’됨에 따라 민족문화예

술에 대한 역사와 미적인 학습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양음악의 그것조차 만족스럽게 학습하지 못하여 우리들 모두가 한반도에

머물러 삶과 음악회복만을 지상과제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는 한반

도의 분단과 역사와 미학 앞에 우리들을 세워놓고 ‘대화’케 하여 이보다 더

‘큰 음악’을 창출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악수를 건네고 있다.1) 윤이상은 ‘큰

음악가’이다. 그의 큰 음악은 한국에서 행동하는 민족윤리성으로 학습하고

체험한 음악과 세계관으로 깨닫고, 그 생명의 존엄성을 통하여 자연과 우주

와 끊임없이 화해하려고한 '큰 음악가’이다.

123) 노동은, 「音樂氣學Ⅰ」, 『민족음악의 이해』 제3권, 앞의 책을 참고하라. 124) 이 글을 매듭지으면서 윤이상의 유럽생활기를 다시 추적하여 그의 삶과 예술을 같은 선상

에서 연구되어져야 할 과제를 남기고 있다. 이 글은 두 번의 발표를 통해서 발전시킨 글이

다. 한번은 1994년 9월 28일 한국악회가 개최한 제3회 현대음악제(대전시민회관 소강당, 오

후 4시)에서 발표한 「윤이상의 초기가곡연구」이고, 또한번은 1998년 11월 4일 평양의 인

민문화궁전 원탁회의실에서 개최된 윤이상음악연구토론회에서 발표한 「윤이상의 삶과 예

술」이 그것이다. 본 글은 이 때 발표한 글을 토대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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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윤이상의 삶과 예술 77

노동은의 윤이상 글

1. 「윤이상 대담」, 월간 『객석』 1990년 12월호, 서울:(주)예음,1990,112-123쪽. 2. 「통영과 윤이상」, 『통영문화』 11월호, 통영:통영문화재단,1991, 1-2쪽. 3. 「윤이상, 그의 고뇌와 희망」, 『고대신문』, 1992년 11월23일자, 서울:고려대학교

신문사,1992. 4. 「분단과 세계를 넘어 인간과 음악을 위대하게한 윤이상」, 『’93. 20세기 음악축제-민족음악』 발표논문(1993.10.22,밤7시), 서울:페스티발 앙상블, 1993, 1-14쪽. 이 글은 노동은·김응교 편저, 『불멸의 예술가 18인』 , 서울:민글, 1993, 55-70쪽에 다시 게재되었다.

4. 「재독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세계-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인 음악」, 주간 『내일

신문』, 1993년 12월 20일자, 통권 제13호, 서울:내일신문사,1993,38쪽. 5. 「우리가 찾아야할 윤이상」, 월간 『객석』 12월호, 통권118호, 서울(주)예음,1993,

126-129쪽. 6. 「윤이상음반 출시 의의」, 『성대신문』, 1994년 2월 26일자, 서울:성균관대학교신

문사,1994. 7. 「내가 본 윤이상 음악세계」, 『광주일보』, 1994년 9월6일자, 광주:광주일보사,1994. 8. 「윤이상 음악제를 보고」, 『교수신문』, 1994년9월16일자,제50호, 서울:교수신문사,

1994,12쪽. 9. 「윤이상: 한국생활기의 음악세계」, 한국악회 주최 94 대전현대음악제 발제글, 1994.

9.28.(대전문화원강당); 이 글은 계간 『민족예술』 겨울호,통권 제4호, 서울:사단법

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1994,78-88쪽에 다시 게재되었다. 10. 「새로 발굴한 윤이상의 50년대 글과 가곡」, 『민족음악의 이해』 Ⅲ, 서울:민족

음악연구회,1994, 325-341쪽. 11. 「통영, 그 섬에 가고 싶다」(노동은의 ‘그것이 알고 싶다’ 5) , 『음악과 민족』, 제

9호, 부산:민족음악학회,1995, 127-136쪽. 12. 「추모 대특집, 예술의 위기 돌파했다-민족문화의 위대함 일깨운 윤이상의 음악세

계」, 『한겨레 21』 제84호, 1995년 11월16일자, 서울:한겨레신문사,1995,100-101쪽. 13. 「윤이상 추도사」, 『민족음악의 이해』 Ⅳ, 서울:민족음악연구회,1995, 3-6쪽. 14. 「윤이상선생의 음악세계」, 『고 윤이상선생 음악추모제』, 고 윤이상선생추모제 준

비위원회 주최, 월간 객석후원, 1995.12.18(오후 3시,문화일보홀). 15. 「조국을 가르친 음악가 윤이상」, 사내보 『에넥스』 1996년 신년호, 서울:주식회

사 에넥스,1996, 16-17쪽. 16. 「윤이상, 자연과 우주로 떠난 혼」, 『1996 브리태니카 세계연감』, 서울:한국브리

태니카,1996, 345쪽. 17. 「죽는 날까지 조국과 음악을 사랑했다-윤이상」, 『문화와 나』 9·10월호, 통권30

호, 서울:삼성문화재단, 1996, 94-95쪽. 18. 「윤이상통일음악회를 다녀와서, 한마음으로 확인한 화해의 희망」, 『한겨레신문』,

서울:한겨레신문사,1998년 11월13일자,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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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음악과 민족 제17호

19. 「참관기:제1회 윤이상통일음악회를 다녀와서-분단을 넘어 음악으로 하나되기」 , 『교수신문』 제146호, 서울:교수신문사,1998년 11월 23일자, 11쪽.

20. 「민족에게 통일의 나눔과 섬김의 소리를」, 『음악춘추』, 12월호, 통권40호, 서울:음악춘추사,1998, 80-88쪽.